鶴山의 草幕舍廊房

Faith - Hymn

[스크랩] 아름다운 인연, 불교를 찾아서

鶴山 徐 仁 2009. 7. 20. 08:55

아름다운 인연 ,불교를 찾아서

rlacjftjs195 2009.05.03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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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란 무엇인가?

 

오늘날 지구상에는 다양한 문화와 민족이 함께 어울려 살고 있습니다. 그 결과 민족과 문화의 특성에 따라 다양한 종교가 발생했습니다. 여기서 ‘종교’란 말 그대로 최고의 가르침 즉, 궁극적인 가르침을 뜻합니다. 일반적으로 종교는 교주 , 교리 ,그리고 교도가 있어야 성립이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종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어렵고 힘든 일이 생기면 종교나 어떤 절대적인 힘에 의지하려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변에서 잘못된 신앙에 빠져 패가망신하는 이들을 자주 보게 됩니다. 그것은 잘못된 종교를 믿고 따랐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종교 중에서도 올바른 종교를 찾아 믿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예부터 인간은 종교를 찾아 믿는 것을 대단히 중요합니다.  예부터 인간은 자신에게 닥친 문제를 어떤 절대적인 존재에 의지하여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산,해,달, 하늘 심지어는 태풍에도 신이 있다고 믿고 예배의 대상으로 삼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로 인해 인류 역사에 신이라는 개념이 생겨난 것입니다. 이처럼 신을 절대적으로 믿는 가르침인 유신론적 종교에서는 인간은 신의 피조물이기에 절대적인 복종을 통해서만 인간의 가치를 구현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인류 역사 속에서는 유신론적인 종교를 부정하고 인생과 우주에 대한 사유로 궁극적인 해답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결과 인류에게 크게 두 가지 흐름의 종교가정립된 것입니다. 하나는 신의 종교이고, 다른 하나는 진리를 믿고 행하는 종교입니다.
신의 종교는 대체로 서양의 종교관입니다. 서양 종교는 절대적인 신을 기본으로 합니다. 따라서 불교에 입문하는 사람은 이러한 서양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불교 - 참된 나를 찾아가는 길

불교는 지금부터 약 2600여 년 전에 인도에서 태어나서 깨달음을 얻으신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행하는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불교의 교주는 석가모니 부처님입니다. ‘불교’에서 불이란 인도의 산스크리트어 붓다의 음사로 ‘깨달은 사람’을 말합니다. 무엇에 대한 깨달음인가?  바로 진리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불교에서는 모든 중생이 진리를 깨치면 부처님이 될 수 있다고 합니다.
불교의 진리는 우리에게 당당하게 살 수 있게 하는 지혜를 줍니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완성하겠다고 하는 정신으로 굳게 결심하고 그 믿음으로 사는 사람에게 그 목표는 더욱 가까워질 것이고, ‘난 안 돼’ 하면서 소극적으로 사는 사람에게는 그만큼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당하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바른 진리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믿고 행하는 종교는 인류 역사에 불교 하나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의 가치는 인류역사에 더욱 빛나는 것입니다. 진리를 모르고 사는 세상은 고달프지만 진리를 알고 행하는 삶은 자유롭고 편안합니다. 불교를 처음 접한 사람들은 설사 어렵더라도 불교의 진리야말로 나를 바꾸고 세계를 변화시키는 원동력임을 알고 열심히 정진해 나가면 마침내 참된 삶과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어떤 것일까? 우리의 삶은 나고 늙고 병들어 죽는 생노병사의 일대사 인연을 해결하는 과정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말은 쉽게 할 수 있지만 태어난다는 일만 생각해도 얼마나 고생스럽고 힘든 일입니까? 또한 우리는 살아가면서 겪는 작은 상처 하나에도 사느니, 못사느니 합니다. 그리고 큰 병고에 시달리든가 평생을 함께 의지하던 이의 이별과 죽음에 부딪쳤을 때 오는 고통과 마음의 아픔은 눈물로도 감당할 수 없는 일입니다. 돌아보면 인생의 많은 시간은 즐거움보다 괴로움과 고통으로 얼룩진 나날이 더 많은 것처럼 느껴집니다. 행복했던 시간은 기억에 없고 오늘도 고통스럽게 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왜 사는지, 이 길을 왜 가야하고 그 끝에는 무엇이 있는지, 끝도 모를 인생을 그저 안개 낀 다리를 건너는 사람과 같이 어림짐작으로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어림짐작으로 모르고 사는 삶을, 알고 살아가는 삶으로 바꾸어 주는 가르침이 바로 불교입니다. 즉, 죄를 지어도 그것이 죄인 줄 모르는 사람은 계속 그 행위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죄를 저지르면 벌을 받고 그것이 나와 남에게 아픔을 준다는 사실을 알면 다시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불교는 나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우리가 어떻게 태어났고, 어떻게 살아가야하는지 해답을 주고 있는 종교입니다.
또한 불교는 믿음과 수행을 겸비한 종교입니다. 또한 불교는 수행체계를 통해 인간의 정신과 삶을 획기적으로 전환시키게 하는 가르침입니다. 수행이란 혹독한 시련을 통해 자신을 단련하는 고행과는 다른 것입니다. 현실에 대한 바른 이해를 통해 나쁜 습성을 고쳐나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수행은 진리를 깨치기 위해 탐욕에 찌는 자신의 잘못된 습관을 좋은 습성으로 바꾸어 마침내 깨닫게 하는 과정입니다.

 

지혜의 길
 바른 생각에서 지혜가 나옵니다. 즉 자기 중심의 생각에서 전체를 보는 안목으로 생각을   넓힐 때 지혜가 나옵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말씀을 지혜의 가르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첫째, 무명 (無明)에서 벗어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어리석은 생각을 버리라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비록 원수 사이 라도 입장을 바꾸어 생각하거나 욕심을 버리면 원수와 함께 차 한 잔 나눌 수 있는 여유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대립과 갈등의 원인은 자신의 욕망이기 때문입니다. 화가 났을 때 자기 마음을 잘 관찰해 보면 온갖 다툼과 화의 원인이 다른 사람에게도 있지만, 자신에게도 있음을 알게 됩니다. 즉 상대가 자신이 바라는 것만큼 해주질 않았거나 자기에게 불이익을 주었을 때 화가 나기도 하는데 그것 또한 자기 욕심에서 나온 것입니다. 시간이 흘러 그것이 다 부질없는 것이 되었을 때 돌아보면 당시의 화가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것이 욕심에 집착하여 진리를 보지 못하게 막는 무명입니다. 이 무명에서 벗어나 밝은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둘째, 자신의 무지가 모든 불행과 비극의 시초임을 알았으면 남을 나처럼 생각해주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위에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뒤에 어떤 결과가 올지 제대로 생각하지도 않고 행동하는 것을 자주 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행동에 앞서 그 결과를 생각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생각에 앞서서 행동부터 합니다. 그 잘못된 행동에서 고통과 아픔이 생기는 것입니다. 따라서 눈앞의 이익에 급급한 행동과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면 지금까지 보지 못하였던 세계가 열릴 것입니다. 불교는 바로 이러한 세계를 열어 보여주며 그 길을 함께가는 가르침입니다.

 

진리를 향해 정진하는 삶

삼귀의( 三歸依)- 바른 믿음으로

일상적인 삶을 살다 불교에 입문하려고 첫 마음을 냈다면, 그 순간부터 바른 믿음을 가지고 사는 참다운 불자가 되어야 합니다. 참다운 불자가 되려면 먼저 지극한 마음으로 삼보에 귀의하여야 합니다. 삼보란 세간에 비할 데 없는 세 가지 보배라는 말로서 부처님 (佛)과 부처님의 가르침(法)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僧)를 말합니다. 이 삼보에 돌아가 의지하는 것을 삼귀의라고 하는데 귀의란 돌아가 의지한다는 말로 지금까지의 잘못된 믿음과 생각을 버리고 참다운 진리의 세계로 돌아가 의지한다는 말입니다. 삼귀의례는 불교신자가 자신이 불교인임을 확인하고 맹세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 귀의함은 우리의 삶의 목적을 ‘자기 운명과 우주의 주인이 되는 길’로 잡는 것이며, 부처님의 원력에 힘입어 모든 집착과 욕망에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간절한 신앙의 자세를 갖는 것입니다. 즉 이상적 삶의 길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부처님을 따르겠다는 지극한 맹세로서 무릎 끓고 고개 숙이는 마음의 자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의함은 부처님의 가르침이야말로 깨달음에 이르는 최선의 방법임을 굳게 믿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애욕을 끊고 애욕이 없어져서 적멸(寂滅)인 열반(涅槃)에 이르는 진리에 귀의함을 뜻합니다.
스님들께 귀의함은 부처님의 법을 따라 수행하고 가르치는 스님에게 귀의함이니, 즉 좋은 벗과 복 밭(福田)인 거룩한 스승에게 귀의하는 것을 말합니다. 삼귀의례는 불교신자의 가장 중요한 근본 맹세입니다. 이는 삶의 목적을 불 세계에 둔다는 이념의 확인이기도하고, 그에 이르는 방법을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지한다는 방편(方便)의 확인이며, 나아가 그것을 실천하는 도반들의 모임인 승가에 절대적 신뢰를 표하면서 공동체의 일원으로 새로운 삶을 살겠다는 다짐이기도 합니다. 또한 삼귀의를 통해 부처님께 귀의한 불자들은 목숨이 다 할 때까지 믿음을 변치 말아야 하며 지극한 마음으로 삼보를 공경하여야 하고, 모든 일에 모범이 되어야합니다, 불자는 스스로 자신을 낮추고 검소하게 살아가야 함은 물론, 세상의 모든 일에 있어서 교만심을 버리고 하루하루의 삶을 돌이켜 보고 반성해 나가는 자세로써 살아가야합니다. 특히 우리가 부처님을 믿고 정진해 나감에 있어 가져야 할 삶의 바른 자세중 하나가 자기반성입니다. 우리는 끊임없는 반성 속에서 삶을 돌이켜 보고 올바르게 부처님 곁에 가고 있는지 또는 처음 부처님께 귀의하였을 때의 마음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지 살펴야합니다. 만약 스스로의 허물을 발견하면 부처님 앞에 그 잘못을 말하고 참회하여야 합니다.

 

오계(五戒)-불자의 실천덕목

어둠의 세계에서 생명의 근원인 밝은 광명을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어둠을 밝히는 등불과 빛을 향해 나가는 우리의 발걸음일 것입니다. 여기서 등불은 바로 진리의 가르침이고 밝은 곳을 향한 발걸음이 바로 계율입니다. 진리는 우리의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고 계율은 우리의 몸가짐을 바르게 하여 가지 말아야 할 곳을 가지 못하게 하고 넘지 말아야 할선을 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계는 부처님께 귀의한 사람이면 누구나 혹은 올바른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응당히 받아들이고 지켜야할 가치의 기준으로서 행동의 지표가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계율을 잘 지켜 몸과 마음을 잘 가다듬으면 저절로 밝은 지혜가 생겨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실 때 부처님의 제자인 아난존자가 “이제까지 부처님을 스승으로 삼았지만 부처님께서 열반하시면 누구를 스승으로 삼아야 합니까?” 라고 묻자 “계를 스승으로 삼아라.”라고 말씀하셨으니 불자가 스승으로 삼아 지켜야할 실천덕목이 바로 오계입니다.

 

첫째, 산목숨을 죽이지 말라(不殺生)
둘째,주지 않는 것을 갖지 말라( 不偷盜)
셋째, 삿된 음행을 하지 말라( 不邪婬)
넷째, 거짓말을 하지 말라 (不妄語)
다섯째 ,음주를 하지 말라( 不飮酒)

 

오계는 모든 악 가운데서도 가장 대표적인 다섯 가지 악을 범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지 말라’는 것은 금지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실천이 전제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산목숨을 죽이지 마시오’의 경우 모든 생명은 본래 불성을 가진 고귀한 존재이므로 ‘산목숨을 죽이지 말라’의 뜻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동의 사회생활을 하는 우리들이 악을 범하지 않고 선을 신천 함으로써, 서로를 존중하고 아끼며 평화롭게 살아가는 삶의 터전을 이룩하려는 것이 이 오계의 목적인 것입니다.
이를테면 ‘불살생’의 경우 모든 생명은 본래 불성을 가진 고귀한 존재이므로 ‘산목숨을 죽이지 않는다’ 는 나 혼자만의 계율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살아있는 생명은 더 잘 살도록 도와주며 죽은 목숨까지도 살려내는 보다 적극적인 실천을 요구합니다. 현대에 들어서 자주 접하게 되는 장기 기증이라든가 생태 환경보존을 위한 노력 등이 바로 이러한 ‘불살생계’의 실천적 삶이라 할 것입니다. ’불투도, 불망어, 불음주‘의 계율 또한 다를 바가 없습니다. 악을 범하지 않은 삶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선을 실천함으로써, 서로 존중하고 아끼며 평화롭게 살아가는 삶의 터전을 이룩하려는 것이 바로 오계의 목적 입니다.그렇기에 오계의 바른 실천은 ’주지 않은 것을 갖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 것까지도 남에게 기꺼이 내어주며 ,거짓말이 아닌 나와 남 모두에게 이로운 말만 하며 ,술에 취해 미혹에 빠짐을 경계하여 항상 청정한 가운데 지혜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노력하는데 있습니다. 계는 오탁악세를 헤쳐 가는 구원의 밧줄이며 구명정과도 같습니다. 그만큼 소중한 것입니다. 과거의 악업을 되풀이하지 않고 나와 남이 함께 선업을 쌓아 고통을 극복하고 불세계로 가기위한 행동의 가치기준입니다. 따라서 계를 받아 지킨다는 것에는 두 가지의 중요한 다짐과 결의가 전제되어야합니다.
첫째로는 계의 가르침이 최선의 가치라는 사상에 동의하는 것이고 둘째로는 그 가치를 반드시 실천 하겠다는 행동에 대한 맹세를 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계를 받아 지킨다는 것은 구속이 아닌 완전한 자유를 찾기 위하여 선택한 스스로의 능동적 자세이므로 불자라면 모름지기 계를 어겼을 때 반드시 참회하고 항상 계를 지키기 위하여 노력해야 합니다.

 

부처님의 생애

불교는 지금부터 약 2600년 전에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시작된 종교입니다. 당시 인도는 사상적으로 혼란한 때였습니다. 많은 종교인들이 제각기 자기들의 가르침을 진리라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진리라는 것이 각 종교가 주장하는 것처럼 그렇게 여러 가지일 수 있는 것일까요? 또한 만약 어느 한 종교가 자기들의 가르침만이 옳고 다른 종교의 가르침이 그르다고 주장한다면, 다른 종교에 의해서 똑같이 그 가르침이 완전한 진리가 아니라고 비판받게 되는 것은 뻔한 일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여러 종교의 서로 다른 주장이 모두 진리라고 한다면, 결국 서로 다른 종교란 있지 않게 되고 모두 하나의 종교가 될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어느 종교에서 주장하는 진리가 과연 참다운 진리인지 아닌지 하는 것을 확인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종교적 진리는 다른 어떤 것과 달리 인생의 가장 마지막의 문제에 대한 대답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잘못된 종교적 가르침은 인생을 잘못된 길로 이끌 수 있는 것이기에 더욱 그러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당신의 종교에서 주장하고 있는 진리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의문을 품게 되었고, 그 때까지 진리라고 믿어 왔던 것들이 대부분 고정된 관념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아셨던 것입니다. 부처님은 그런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어느 한편의 입장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편견과 집착에서 벗어나 모든 현상들을 설명해낼 수 있는 완전한 진리를 찾게 되었고 드디어 그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 깨달음의 진리를 다르마(Dharma), 즉 법(法)이라고 합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법은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변치 않는 것입니다. 시간이 흐르고 아무리 과학이 발달한다고 해도 그 깨달음의 법이 고쳐지고 또 보충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그 법이 인도에서 사셨던 석가모니 부처님에 의해서 깨달은 것이니까 인도에서는 잘 맞을지 몰라도, 미국이나 유럽처럼 관습이나 문화적 배경이 인도와 다른 곳에서는 맞지 않는 점이 조금 있다거나, 아프리카처럼 문화나 역사적 전통이 전혀 다른 곳에서는 그 법이 맞지 않는 부분이 많다거나 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법은 새로운 사실이 아니라 원래부터 존재하고 있던 진리를 깨달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부처님의 깨달음의 법은 언제 어디서나 항상 올바른 진리인 것입니다.

 부처님은 지금으로부터 약 2,600여 년 전, 기원전 624년에 지금 네팔의 타라이 지방인 카필라국 샤카족의 왕인 정반왕과 마야부인 사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성은  고타마(최상의 소라는 뜻)였고, 출가하기 전의 이름은 싯달타(모든 일이 뜻대로 이루어진다는 뜻)이었습니다. 고타마 싯달타가 출가 수행하여 깨달음을 얻어 부처님이 되자 사람들은 그를 석가모니 즉, 석가족출신의 성자라고 불렀습니다.
 카필라국은 히말라야 남쪽 기슭의 초목 지대에 자리한 조그만 왕국으로써 쌀을 주식으로 하는 농업국입니다. 이웃에는 코살라와 마가다와 같은 큰 나라들이 있어 위협을 받고 있었으나 비교적 풍요롭고 평화로운 생활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카필라국의 정반왕은 석가족의 후예로서 용감하고 지혜로운  왕이었으나, 늦도록 슬하에 자식이 없어 걱정하던 중, 어느 날 마야부인은 몸속으로 흰 코끼리가 들어가는 꿈을 꾸고 아기를 가졌습니다.
 마야부인은 해산일이 다가오자 당신의 관습에 따라 해산을 하기 위해 친정인 코올리성을 향해 길을 떠났습니다. 화창한 봄날, 왕비를 태운 가마 행렬이 룸비니 동산에 이르자 왕비는 산기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일행은 나무 그늘 밑에 휘장을 치고 부인은 무우수나무의 동쪽 가지를 잡고 아기 왕자를 낳았습니다. 그날이 바로 음력 사월 초파일입니다.  부처님은 태어나시자마자 일어나 동서남북으로 일곱 걸음을 걷고 사방을 둘러보며 한 손으로 하늘을, 한 손으로 땅을 가리키며 사자후를 토했습니다.

 

 “하늘 위와 하늘 아래 오직 나 홀로 높다.
  온 세상이 고통 속에 있으니 내 이를 평안케 하리라.“
  ( 天上天下 唯我獨尊 三界皆苦我當安之)

 

 이는 ‘탄생게’ 라고 불리는 유명한 선언으로 부처님, 나아가서는 불교의 기본을 잘 나타내는 가르침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태자가 외친 ‘천상천하 유아독존’ 이라는 말은 종종 독불장군이라는 식으로 오해되기도 합니다. 따라서 금방 태어난 아기가 어떻게 사방으로 걸을 수 있으며 그런 외침을 할 수 있겠느냐는 사실적인 입장보다는 거기에 담긴 뜻을 잘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이 말의 본래 의미는 태자가 도솔천에서 내려온 일생보처보살로서 부처님을 제외하고는 가장 훌륭한 인간이라는 의미이며 동시에 깨달음을 구하는 모든 중생 하나하나가 가장 존귀한 존재라는 지혜의 외침, 생명 존엄의 선언인 것입니다.

 정반왕은 태자의 이름을 ‘고타마 싯달타’ 라고 지었습니다. 왕자의 앞날이 마음먹은 대로 만사형통하라는 축원이 담긴 이름입니다.
 태자를 낳은 지 7일 만에 어머니 마야부인이 세상을 떠나니 어머니를 잃은 태자는 당신의 풍습에 따라 이모인 마하파자파티의 양육을 받으면서 무럭무럭 성장하였습니다. 싯달타 태자는 왕궁의 풍요 속에서 총명하고 건강하게 자랐습니다. 7세가 되자 태자는 학문과 무예를 익히기 시작하여 곧 모든 학문과 무예를 통달하여 더 이상 그를 가르칠 만한 스승이 없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정반왕은 그를 극진히 생각하여 계절에 따라 생활하도록 궁전을 세 곳이나 지어주는 등 온갖 호사 속에 성장하게 하였습니다.
12세가 되던 어느 봄날 태자는 부왕과 함께 농경제(農耕祭)에 참석하였습니다. 그 때 태자는 농경제에 참가한 농부들이 마르고, 고단한 모습과 쟁기를 끄는 소들이 채찍을 맞아 피를 흘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도한 쟁기가 지나간 흙 속에서 굼틀거리는 작은 벌레를 새가 날아와 부리로 조아 먹는 광경도 보았습니다. 태자는 약육강식의 세상을 직접 목격하고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 농부는 낡은 옷을 입고 땀을 흘리며 일하고, 소는 농부의 채찍을 맞으며 힘들게 일하고, 쟁기에 의해 흙 박으로 나온 벌레는 새들이 잡아먹히고 만다. 이처럼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잡아먹고 사는 것이 과연 이 세상의 올바른 질서인가?
 
이처럼 생각한 싯달타 태자는 깊은 명상에 잠겼습니다. 부왕인 정반왕은 태자 싯달타가 명상에 잠긴 모습을 보면서 더욱 생활이 즐겁고 호화스럽게 보살펴서 출가의 길을 미연에 막으려고 많은 노력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태자의 가슴속에 자리한  고뇌는 깊어만 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성년이 된 태자는 백성들이 사는 모습을 살피기 위하여 부왕 몰래 성문 밖으로 유람을 나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동문, 남문, 서문에서 각각 늙고, 병들고, 죽은 사람을 보며 이렇게 괴로워하였습니다. “ 인간은 태어났다가 결국은 늙고 병들어 죽고 마는 것, 어머님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아버님도 나도 언젠가는 죽는다. 이 세상에 태어난 자가 필연적으로 늙고, 병들고, 죽는 괴로움. 아! 인생은 dg허무하고 괴로운 것이다. 아무리 몸부림쳐도 벗어날 수 없는 죽음의 수렁이 앞을 막아서고 있다.”

생명을 가진 그 어떠한 것도 이 고 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번민하던 싯달타 태자는 다음 날 북문으로 나갔다가 출가 수행자의 모습에서 평화스러운 모습을 발견 하게 됩니다. 수행자를 만난 후 태자의 인생관은 점차 변모 되였고, 마침내 부왕에게 출가하여 수도 할 수 있도록 허락해 줄 것을 간청하였습니다. 정반왕은 크게 놀라 온갖 말로 회유를 하였지만 태자의 결심은 추호의 변동이 없었습니다. 결국 부왕은 태자에게 왕위를 이을 왕손을 얻기 전에는 출가할 수 없다는 조건을 내세워 같은 석가족인 이웃나라 콜리성의 dity다라 공주와 결혼을 시켰습니다. 마침내 아들 라훌라가 태어나자 태자는 모든 사람이 잠든 한 밤중에 출가를 결행하니 그의 나의 29세 음력 2월 8일 이었습니다.

출가를 한 싯달타는 스승을 찾아 나섰습니다. 당시 가장 훌륭하다고 소문난 두 명의 수행자로부터 선정에 이르는 가르침을 얻었습니다. 즉 정신통일을 하여 고요한 경지에 도달하여 해탈하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선정을 통해서는 괴로움에서 벗어나 영원한 행복과 평화를 얻을 수 없음을 알게 된 싯달타는 두 스승을 떠나 독자적인 수행을 시작하였습니다. 여러 스승에게서 배웠으나 곧 스승의 경지에 도달하여 더 이상 그를 가르칠 이가 없었을 때 수행자 고마타는 당시 다른 수행자들이 그러했듯이 고행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부처님은 과거의 어떤 수행자도, 미래의 수행자도 자신과 같은 고행을 할 수 없을 것이라 하셨을 만큼 고행에 몰입하였습니다. 고타마의 수행은 무서우리 만치 엄격한 것이었습니다. 몸이 쇠약해져 죽음 직전의 상태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6년간에 걸친 극심한 고행을 통해서 깨달음에 이를 수가 없었고, 육체를 학대하는 것만이 진정한 깨달음의 길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고행을 포기하기로 하였습니다.
 수행자 고타마는 자리에서 일어나 근처 네란자라강에 내려가 지치고 때 묻은 몸을  씻었습니다. 그리고 소를 몰고 지나가던 수자타라는 소녀가 바치는 우유죽을 마시고 건강도 회복하였습니다.
 고타마는 건강해진 몸과 상쾌한 마음으로 보리수 아래에 놓인 풀잎을 깔고 앉아 정신을 한 곳에 집중 하고 참선 수행에 몰입 하였습니다. 며칠이 지난 새벽에 고타마는 마침내 붓다가야의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어 부처님이 되셨습니다. 이때가 부처님이 35세 되던 해 음력 12월 8일 이었습니다.
이러한 부처님의 치열한 구도의 모습은 우리 모두가 스스로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 보여주신 삶입니다. 온갖 번뇌와 고통의 수렁에서 허덕이는 중생도 사실은 모두 부처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 세상에 알려 주신 것입니다.  부처님의 성불 이후 새로운 인간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깨달음을 얻으신 부처님은 탐욕에 허덕이는 중생을 지혜의 길로 이끌기 위해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기 위한 여행을 떠났습니다.
부처님은 붓다가야를 떠나신 후 바라나시의 녹야원에서 최초로 다섯 수행자들에게 설법을 하셨습니다.

''수행자들아, 이 세상에는 두 가지 극단으로 치우치는 길이 있느니라. 그 하나는 육체의 요구대로 자신을 내맡기는 쾌락의 길이고, 또 하나는 육체를 지나치게 괴롭게  하는 고행의 길이다. 수행자는 이 두 극단을 버리고 중도를 배워야 한다. 나는 바로 중도를 깨달았으며, 중도에 의하여 생로병사의 온갖 괴로움을 버리고 평화로운 기쁨을 얻었느니라.''


첫 설법은 중도의 가르침이었습니다. 이어서 네 가지의 성스러운 진리인 사성제(四聖諦)를 통하여 연기의 이치를 가르치셨습니다. 이것을 최초로 설법인 초전법륜(初轉法)이라 하며, 이때 깨달음을 얻은 다섯 분이 부처님의 최초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사슴동산에서 처음으로 설법을 하고 얼마 안 되었을 때, 한 장자의 아들 ‘아샤’라는 청년과 그 친구들이 출가하여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고, 그 아들을 찾으러 왔던 야사의 부모가 부처님께 귀의함으로써 비로소 교주이신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과 부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 즉 불 법 승 삼보를 갖춘 불교 교단이 성립되었습니다.
이후 왕사성을 중심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이 퍼져나가 수많은 제자들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수행자와 재가자, 귀족과 평민 ,노예를 차별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대하셨습니다. 그것은 진리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하고 깨달음에는 빈부귀천이 없기 때문입니다.
중생 속에서 동고동락 하시며 수레바퀴를 굴리신 지 45년 되던 해, 부처께서는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자기 자신에 의지하라


진리는 영원히 의지하고, 진리를 스승으로 삼아라.
진리는 영원히 꺼지지 않은 등불이 되리라.
이밖에 다른 것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
이세상의 모든 것은 변하니
부지런히 정진하여 고통의 속박에서 벗어나라.’

 

라는 가르침을 마지막으로 남긴 채 쿠시나가라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에 드셨습니다. 길에서 나서 길에서 살다 길에서 가시니 이 날이 음력 2월 15일 열반절입니다.
 열반이란 산스크리트어 니르바나에서 온 말로 ‘불어서 끈다’는 뜻입니다. 무엇을 불어서 끄는가? 바로 욕망과 번뇌의 불을 끄는 것으로 탐욕과 성냄, 그리고 어리석음을 영원히 없애 모든 번뇌를 소멸시킨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인연으로 생긴 것은 반드시 소멸하는데 부처님께서는 이 무상의 진리를 스스로 따르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생애는 누구든지 부처님의 말씀대로 믿고 수행하면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보이신 삶이었습니다, 이제 부처님의 육신은 소멸하였지만 그 가르침은 어두운 밤의 등불처럼 중생의 앞길을 밝게 비추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인류가 살아있는 한 부처님의 가르침은 영원히 살아있을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

연기법(緣起法)

부처님께서는 출가의 진리를 통하여 진리, 즉 법을 깨달아 부처님이 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진리, 즉 깨달음의 내용은 무엇일까요?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태어남으로 저것이 태어난다. 이것이 없기 때문에 저것이 없고 이것이 사라짐으로 저것이 사라진다.
이것은 연기법 또는 인연법이라 하는 것으로서 모든 것은 독자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는 진리입니다. 즉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바로 이런 연기의 법칙 즉, 서로 원인과 결과가 되어, 서로 의존하며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산 너머에 피어오르는 연기는 독자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라 섶에 붙은 불과의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연기법에 의하면 우리의 고통과 슬픔은 독자적으로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하여 신의 뜻이나 숙명에 의하여 나타나는 것도 아닙니다. 거기에는 반듯이 그럴 만한 원인과 조건이 있게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이 연기의 법칙이 당신이 만든 것이 아니며,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든 나오지 않든 간에 진리로서 변함없는 것으로 당신은 다만 이 진리를 깨달았을 뿐이라 하셨습니다. 요컨대 연기법은 세계와 인간에 대한 불변의 진리라는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연기법은 사실 세계의 현상 관계뿐만 아니라, 어떠한 이유에서 우리의 고통과 불행이 생겨나고 어떻게 하면 그것을 극복하여 즐거움과 행복의 이상에 도달할 수 있는 가하는 인생의 실상을 바르게 알고, 그 바른 인생관에 따라 노력하고 수행하여 이상을 성취하고 길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삼법인 (三法印) - 존재의 참 모습

우주 만유를 관통하는 법칙이 연기라면 존재의 실상을 나타내는  것이 바로 삼법인입니다. 삼법인(三法印) 이란 세 가지 진실한 가르침이란 뜻으로, 도장 인(印) 자를 쓴 것은 도장이 언제 어디서나 같듯이 부처님의 가르침도 언제 어디서나 같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삼법인은 모든 것이 변한다는 제행무상(諸行無常), 모든 변하는 것 에 자아 (自我)라는 실체가 없다는 제법무아(諸法無我), 모든 변하는 것은 괴로움을 낳는다는 일체개고 (一切皆苦) 세 가지를 말 합니다. 일체개고 대신 모든 괴로움을 없앤다는 열반적정(涅槃寂靜)을 넣기도 하는데 이 네 가지를 합하여 사법인(四法印)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첫째, 제행무상(諸行無常)은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한다는 뜻입니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때 드러나는 존재의 속성은 바로 모든 것은 변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천 년 ,만 년 살 것처럼 생각합니다. 권세와 명예, 제산도 영원할 것으로 착각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주위에서 죽음을 경험하거나 세도가와 재력가의 몰락을 경험하면서 모든 것은 영원한 것이 없다는 평범한 진리 앞에 설 때 겸허하게 마음을 비우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차분히 모든 사물을 살피면 지금까지 자신을 유지해 온 생각이 헛된 욕망에 사로잡힌 것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처럼 사물이 무상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영원한 것으로 보는 이 잘못된 생각을 버릴 때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고, 그 속에서 바르게 사는 길을 알게 됩니다.

 

둘째: 제법무아(諸法無我)는 모든 변하는 것에 자아의 실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항상 변하며 이것은 그 조건에 말미암은 것이라는 말입니다. 즉, 인연 따라 생긴 것은 인연이 다하면 흩어지기 때문에 고정 불변하는 실체란 없다는 것입니다. 무아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자기중심적 사고와 아집이 허망한 것임을 가르칩니다. 자신을 포함한 어떤 존재도 영원한 것이 없기에 생각과 사물 역시 그러한 것입니다. 아집과 소유욕을 없애면 인연으로 형성된 존재의 실상을 깨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과 사물이 어우러져 더불어 사는 삼라만상의 세계를 깨닫게 되면 인류세계의 화합과 평화가 앞당겨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즉, 제법무아는 우리를 둘러싼 모든 존재가 실체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밝혀 그 사이에서 집착할 수 없고 얻을 것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가르침인 것입니다.

 

셋째: 모든 변하는 것은 괴로움이라는 일체개고(一切皆苦)입니다. 즉, 무상(無常)하기 때문에 고(苦)라는 것입니다.
세상사는 희노애락(喜怒哀樂)이 있어 괴로움만 있는 것이 아닌데 왜 모든 것을 고통이라고 하는가요?  그것은 기쁨과 즐거움이 일시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집착하여 또 다른 고통을 낳는다는 것 때문입니다.
연기법에 의하면 모든 것은 변하여 고정 불변하는 실체는 없습니다. 기쁨과 즐거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중생은 언제나 자기중심적인 습성에 길들여져 있어 기쁨과 즐거움을 지속하려고 별별 수단을 다 부리지만, 이 세상에 그러한 것은 없습니다.
이처럼 부처님께서는 인간이 가진 이루지 못하는 욕망을 간파하시고 일체가 괴로움이라 설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욕망의 불을 끄고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되면 고통이 사라지고 마음의 평안을 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은 열반적정(涅槃寂靜)입니다. 열반은 진리의 구현입니다. 무상(無常)과 무아의 (無我)진리를 완전히 구현하여 모든 번뇌와 고통의 불을 끈 상태가 바로 열반입니다. 열반은 깨달음을 성취하여 모든 번뇌와 욕망, 대립과 고통이 사라진 고요한  평화의 상태입니다.
이처럼 불자들은 존재의 실상을 바라보게 하는 삼법인의 가르침을 자신의 생활 속에 구현하여 최상의 평화와 자유인 열반을 향해 부지런히 정진해야 합니다.

 

사성제(四聖諦)- 괴로움으로부터의 해방

연기(緣起)와 삼법인(三法印)을 통해 세상의 본래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현실의 고통에서 벗어나 진리를  구현하는 수행의 길을 가르쳐 주는 길이 바로 사성제입니다. 사성제란 ‘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라는 뜻으로 부처님이 녹야원에서 다섯 비구에게 행한 최초의 설법 내용입니다. 사성제란 괴로움(苦)과 괴로움의 원인(集)과 괴로움의 소멸(滅)과 괴로움의 소멸방법(道)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그 첫째인 고성제는 우리가 살고 있는 모습을 깊이 있게 살펴보니‘ 괴롭다’라는 것입니다. 왜 괴로운가? 일반적으로 괴롭다는 말은 세 가지 뜻이 있습니다. 육체적 고통과 있던 것이 없어졌을 때 느끼는 괴로움과 변하기 때문에 껶는 괴로움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이 무상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또 부처님께서는 근본적인 괴로움으로 인생사고(人生四苦)를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생로병사(生老病死)입니다. 나이 들고, 병들고, 죽는 것이 괴로움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태어남이 있기 때문에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 세상에 태어난 생명을 가진 존재면 누구나 예외 없이 겪어야 하는 네 가지 근본 괴로움과 사랑하는 것들과 헤어지는 괴로움인 애별리고(愛別離苦), 원망스럽고 짜증스러운 것과 만나는 괴로움인 원증회고(怨憎會苦),구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구부득고(求不得苦),인간을 구성하는 다섯 가지 요소인 오음(五陰), 즉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에서 비롯되는 고통인 오음성고(五陰盛苦)등을 함께 인생팔고(人生八苦)라고 합니다.  그러면 괴로움을 왜 ‘성스러운 진리’라고 하는가? 그것은 인생팔고(人生八苦)를 여실히 알 때만이 괴로움을 극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괴로움을 느끼는 현실은 불행한 일일지 모르나 그것을 분명히 알 때 오히려 극복의 길이 열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성제에서 고통을 제일 처음에 말씀하신 것은 괴로움을 근본문제로 삼는 것이 불교의 시작이며 그것을 해결한 것이 불교의 끝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집성제(集聖諦)는 위의 괴로움을 해결하기 위해 그 괴로움의 원인이 무엇인지 밝히는 가르침입니다. 괴롭다는 현실을 알았으면 그것의 원인을 규명하고 해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모든 것은 연기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집성제에서는 고의 원인을 무명(無明) 때문이라고 합니다. 진리를 등지고 ‘나다’하는 착각 속에서 온갖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행동을 하기 때문에 괴롭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즉, 진리를 등지고 잘못 살아가는 것의 원인이 탐욕, 성냄, 어리석음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인식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멸성제(滅聖諦)는 현실은 괴로우며 그것의 원인이 무명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그 원인을 해결하고 극복해 나가는 길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고통이 있다면 고통 없는 세계도 있고 거기에 이르는 길도 있을 것이라는 것. 고통이 사라진 해탈, 열반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멸성제인 것입니다.

 

네 번째, 도성제는 그런 확신을 심어주고 또 이상을 제시하고 멸(滅)에 이르는 구체적 방법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해탈, 열반에 이르려면 ‘이렇게 하면 된다’ 하고 제시한 여덟 가지 바른 실천법인 팔정도(八正道)가 바로 그것입니다.

 

 팔정도(八正道) - 여덟 가지 올바른 길

 팔정도란 여덟 가지 바른 수행의 길이라는 뜻입니다. 팔정도에서 ‘정’(正) 이란 바르다는 뜻으로 ‘중’(中)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정도(正道)는 중도(中道)입니다.  중도의 내용은 부처님께서 제자인 소나 비구에게 주신 가르침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소나 비구가 아무리 열심히 정진을 해도 잘 되지 않아 포기하려 할 때 부처님계서는 소나가 거문고를 타는 것을 아시고 소나에게, “거문고 줄이 너무 팽팽하지도 느슨하지도 않아야 소리가 제대로 나는 것처럼 중도를 취해야한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중도는 현실적으로 가르침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능력에 맞게 지도하는 가르침입니다. 아무리 훌륭해도 가르침을 필요로 하고 실제로 실천해야 할 사람에게 맞지 않으면 별 소용이 없게 됩니다. 따라서 팔정도는 ‘삶은 고통스럽다’라는 인식과 그 원인, 그리고 고통을 극복하기위한 길을 향해가는 여덟   가지의 길이 있음을 제시해주는 가르침인 것입니다.

 

팔정도란 정견(正見),정사(正思),정어(正語),정업(正業),정명(正命),정정진(正精進),정념(正念),정정(正定)을 말 합니다. 정견은 바른 견해로 세상을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즉, 연기의 진리를 분명히 알고 사제의 진리를 여실히 아는 것입니다.
정사는 바른 생각입니다. 바른 견해를 가짐으로서 바른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즉,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 이치에 맞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정어는 바른 말입니다. 말은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표현하는 수단입니다. 거짓말, 이간질하는 말이나 욕과 비방하는 말은 그 사람이 비뚤어진 생각과 시각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항상 바른 생각과 말을 하여 구업을 짓지 말고 상대방을 존중하는 부드러운 말을 하라는 것입니다.
정업은 바른 행동입니다. 일체의 행위를 바르게 해야 바른 생각과 말에서 나아가 이치에 맞는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정명은 바른 생각입니다. 옳은 일에 종사하고 몸과 마음과 말의 신구의 삼업을 청정히 하면서 바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즉 바른 직업관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정정진은 깨달음을 향한 부단한 노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울러 옳은 일에는 물러섬 없이 밀고 나가는 정열과 용기를 뜻하기도 합니다.

정념은 바른 관찰과 기억입니다. 바른 생각을 잊지 않으며 헛되지 않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정정은 바른 수행입니다. 번뇌 망상에서 바른 견해나 행동이 나올 수 없듯이 항상 마음과 몸을 평안하게 하고 바로 수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팔정도의 첫 방법이 ‘올바르게 보는 것’이라는 점은 매우 많은 것을 말해줍니다. 세상의 만물과 현상을 올바로 보지 못하면 올바른 생각도 올바른 행동도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어떻게 현상과 사물을 보는가에 따라 모든 행동이 좌 우 됩니다. 즉 정견이 우선되지 않으면 팔정도는 실천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정견인가? 그것은 모든 것을 연기의 입장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 만물이 모두 서로에 의지하여 존재하는 것이며 모든 현상에는 그 원인과 결과가 있다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말합니다. 어떠한 편견이나 선입견도 버리고 사물이 존재하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에서 정견은 성립됩니다. 즉 영기의 입장에서 볼 때만이 잘못된 양극단을 확인할 수 있으며 그 극단을 떠난 바른 길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업(業)과 인과(因果) - 불자의 가치관

부처님 당시에 많은 사상가들이 출현하여 갖가지 주장을 폈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여섯 명의 외도가 유명합니다. 이들은 대개 운명론을 주장하거나 쾌락과 향락을 쫓아 마음대로 살라고 가르쳤습니다. 부처님은 이 주장을 비판하시고 이들의 가르침이 초래할 윤리적 폐해를 경계하시면서 인과의 법칙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인과의 법칙은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결과가 따른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어떤 행위도 반드시 결과를 낳는다는 것입니다. 착한 일을 하면 좋은 결과가 따르며, 악한 일을 하면 나쁜 결과가 옵니다. 이를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의 인과응보(因果應報)라 합니다. 또한 그 결과를 낳는 근원적인 행동을 업(業)이라 합니다. 업은 산스크리티어 까르마에서 나온 말로 ‘의도를 가진 행동’을 말합니다. 부처님은 절대자의 섭리나 정해진 운명을 부정하고 모든 것은 인간의 의지와 행동에 따라 성립한다고 설하셨습니다. 즉 스스로의 의지나 행동으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 할 수 있으며 삶의 모든 결과는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의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설령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주어진 것처럼 보이는 출신계급이나 삶의 조건도 사실은 모두 자신의 업에 의한 과보라는 것입니다. 만일 악한 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장 악한 결과가 나타나지 않은다 해도 언젠가는 그 악업의 과보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그 사람의 지금 모습을 보면 전생을 알 수 있고, 그 사람의 현재 행위를 보면 내생을 알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고통스러운 과보를 초래하는 악업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미혹입니다. 번뇌에 물들어 진리에 어둡고 마음이 흐려져 악업을 짓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과보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진리와 깨달음을 지향하는 마음은 선업을 낳고 그 결과 선한 과보를 받게 됩니다.

업을 헤어날 수 없는 굴레로 생각하는 잘못된 이해도 있지만 불교의 업설(業說)은 오히려 자신의 주체적인 의지와 행동으로 삶을 변화시켜 나가는 긍정적 지향과 원리를 담고 있습니다. 수행의 길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생이나 과거에 길들여진 나쁜 습성과 잘못된 행동을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진정으로 참회하고 바로 수행하면 깨달음을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불자의 수행과 신행생활
참회 (懺悔)
 세속의 삿된 가치 속에 휩싸여 정신없이 쓸려 다니다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삼보에 귀의하는 삼귀의례는 자신의 지난날에 대한 참회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아만과 아집에 가득 찼던 자신을 겸허하게 돌아보고 자신의 잘못된 삶과 어리석음에 대한 반성, 앞으로 부처님 가르침대로 올바로 살아가겠다는 다짐, 이것이 불교 신행의 첫 걸음이며,신앙생활의 핵심인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오면서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많은 죄악과 허물을 짓게 됩니다. 이러한 죄악과 허물은 대부분 세속적 욕망과 이기심에서 생겨납니다.  그러므로 우선 잘잘못을 확실히 알아야합니다. 뿐만 아니라 모르고 지어왔던 죄업과 자신의 무지에 대해서도 참회해야합니다. 하지만 인생을 살다보면 잘못인 줄 알면서도 죄업을 짓지 않기란 대단히 어렵습니다. 문제는 간혹 잘못을 범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잘못을 반성하지 않고 합리화하는데 잇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참회하지 않은 채 도리어 합리화하려는 자세는 진실 된 삶을 향해 전진이 아니라, 현실에 안주하는 자세로 퇴보할 뿐입니다. 이것은 진실한 불교인의 자세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참회를 해야 행동변화가 일어나 다시는 잘못이 없게 할 수 있는가?
그것은 왜 그것이 잘못인가를 계율에 의거하여 규명하고 잘못을 저지르게 된 원인가지 확연히 깨닫고 파계(破戒)로 인한 고통과 계행으로 인한 기쁨이 명확히 밝혀져서 가슴에 와 닿게 될 때 다시는 짓지 않겠다는 결심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과정을 통하여 이렇게 끊임없이 반성하는 생활가지도 반성하여 올바른 삶에 대한 확신이 설 때만이 비로소 진정한 참회가 되는 것입니다.

발원 (發願)
 불교는 발원을 수행의 첫걸음으로 삼고 있습니다. 원(願)을 발하는 것, 이것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욕심과 다른 것입니다. 욕심과 발원의 차이는 크게 세 가지로 설명 할 수 있습니다.
첫째. 욕심은 다분히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바람이지만, 발원은 공통적 바람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오직 나만을 위한 원이 아니라, 우리 모두, 인류 전체, 나가서는 일체 중생에 대한 기원을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나와 남은 구분되지 않습니다. 불교의 삶의 자세는 남의 행복이 곧 나의 행복이며, 남이 잘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욕심은 본능적인 것이지만 발원은 능동적인 것입니다. 잘 먹고 잘 살고,부와 명예를 바라는 것은 누구나 본능적으로 타고난 것이지만 발원은 애당초 없는 것을 만들어나가는 것입니다. 즉 원을 발하여 자꾸 베푸는 마음을 연습함으로써, 아상(我想)의 소멸에 접근하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 욕심은 결과를 중시하지만 발원은 과정 그 자체를 중요시합니다. 한마디로, 발원은 결과에 대한 집착이 없는 것입니다. 욕심은 미래에 중점을 두어져 있기 때문에 ,그러한 욕망 달성을 위해서 대로는 현재를 희생할 것을 강요합니다. 하지만 발원은 현재에 중점이 두어져 있습니다. 물론 스스로가 세운 원을 달 성 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은 하지만 결과에 대한 집착이 없이 바로 지금여기에서 노력하는 자체가 즐거운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의미에서 보건대 발원은 참다운 자기 전환의 시작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업생(業生)이 아니라 원생(願生)으로 나아가는 단추인 것입니다. 업생이란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그저 과거의 지은 바 업에 이끌려 살다 가는 것입니다. 원생이란 스스로의 삶을 갈무리해 나가는 것입니다. 의도적으로 방향을 설정해서 과거의 업을 벗어나 새로운 창조적 삶을 살아 나가는 것, 즉 내가 나를 창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실제 발원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발원 가운데 가장 보편적인 것이 사홍서원입니다.
중생을 다 건지오리다. (衆生無邊 誓願度)
번뇌를 다 끊으오리다. (煩惱無盡 誓願斷)
법문을 다 배우오리다. (法門無量 誓願學)
불도를 다 이루오리다. (佛道無上 誓願成)
서원과 수행은 보살의 가장 큰 덕목이자 보살을 보살답게 하는 조건이기도 합니다. 특히 다른 서원에 앞서, 중생을 다 제도하여 업의 바다에서 건져내겠다는 서원을 세운 것은 대승불교의 사상을 오롯이 보여주는 것입니다. ‘번뇌를 모두 끊고, 가르침을 다 배우며, 불도를 이루는’ 서원의 개인적 영역이라면, ‘중생을 다 건지겠다.’ 는 서원은 사회적인 영역에서의 실천을 말합니다.
인간성이 상실되고 온갖 불의와 갈등으로 점철된 현대사회일수록 자비사상의 사회적 실천은 매우 절실합니다.‘ 중생을 다 건지겠다. 는 서원이 더욱 절실히 와 닿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불교인의 신행생활에서 서원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보살의 삶의 굳센 서원의 힘으로 수행 정진하여 깨달음을 이루듯이, 불자들의 생활 또한 서원을 바탕으로 했을 때 정진의 길에서 물러남이 없으며 올바른 삶의 모습을 지켜나갈 수  있습니다.
서원은 클수록 좋겠지만 가급적이면 자신의 현재 상황과 부합하는 것이 좋습니다. 예컨대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이 간절한 경우에는 ‘일체중생이 다 깨달음을 얻어지이다’ 하고, 병고에서 벗어나고자 하거든 ‘일체 중생이 모두 다 병고에서 벗어나 지이다’ 하며 마음 평안함을 성취하고자 하거든 ‘일체중생이 모두 다 마음이 편안하여 지이다’ 하는 식으로 발원해 나가면 되는 것입니다.

기도
기도의 참 뜻
보통 때에는 전혀 종교적 성향이 없던 사람이라도 위기에 처하거나 심각한 상황에 부딪치면 종교에 의지하는 일이 자주 목격할 수 있습니다. 막다른 상황에 몰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 되면 무언가에 의지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일 것입니다.
기도란 일반적으로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느낄 때 신이나 그 밖의 신비한 힘에 의지하여 그것을 이겨내고자 간절하게 비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불교에서 기도는 권정(勸請) 즉 일체 주생들이 어리석은 마음을 떨쳐버리고 하루속히 지혜의 눈이 열리도록 부처님께 청하는 의식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비우고 모든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원력을 세우고 바른 깨달음을 성취하여 모든 이웃들에게 기쁜 마음으로 회향하겠다는 서원의 뜻이 더 큽니다. 즉 불교의 기도는 불. 보살님의 위신력을 찬탄하고 다생(多生)에서 지은 업장을 참회하며 감사한 마음으로 일체중생과 함께하기를 발원하고 회향하는 것입니다. 
기도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천수다라니나 능엄주 혹은 관세음보살 육자대명왕진언, 강명진언 등을 지소하는 것을 주력(呪力)이라 합니다. <<금강경>>이나 <<지장경>>, 혹은 <<화엄경>>,<<법화경>> <관세음 보살보문품><<<원각경>> <보장보살장>등 경전을 읽고 지송하는 것을 간경(看經) 혹은 독경(讀經)이라 합니다. 석가모니불이나, 아미타불, 혹은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미륵보살 등과 같이 불보살님의 명호를 지속해서 연하는 것을 염불 (念佛)혹은 정근(精勤)이라고 합니다. 이외에도 백팔배, 삼천배 등과 같이 절을 하는 방법을 비롯하여 다양한 방법이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는 가능한 매일 ‘같은 장소에서 같은 시간에 같은 요령으로 해나가는 것이 좋습니다. 부드럽기 짝이 없는 물방울이 바위를 뚫는 것은 지속적으로 같은 자리에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내일은 저기에서 이 시간에도 했다가 저 시간에도 했다가 해서는 성취를 보기 어렵습니다. 또 한 한꺼번에 여러 시간을 했다고 며칠은 쉬고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들의 방해를 받지 않고 낼 수 있는 시간을 규칙적으로 정해놓고 하는 것이 좋습니다. 장소도 가급적이면 가까운 사찰을 통하여 동일한 자리에서 해야 합니다. 만약 가정에서 정기적으로 기도를 하고 싶으면 먼저 일상생활에 지장을 받지 않고 기도할 수 있는 편한 시간과 공간을 정해 놓은 다음 절에서 기도하는 것과 같이 봉행하면 되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의 마음은 첫째 믿음이 중요합니다. 즉 이 기도가 결코 헛된 것이 아니며 부처님의 가피가 분명히 나와 함께 함을 깊이 믿어야 하고  둘째는 참회하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평소 우리 자신의 잘못된 생활에 대해 반성하고 기도에 앞서 자신의 마음을 참회하고 비우는 것이요, 셋째로는 주변의 모든 이웃에게 자비로운 마음을 내는 것이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중생이 나와 한 몸임을 깨닫고 그들 모두에게 평화와 안락이 깃들기를 바라며 누구에게도 원망이나 미움을 갖지 않은 마음이어야 합니다.
도, 기도 방법에는 예로부터 전해오는 다섯 가지 덕목이 있는데 그 첫째는 불. 보살게 귀의하여야 하고, 둘째는 향과 꽃으로 공양하고 보시하여야 하며, 셋째는 3배 또는 108배 등으로 예배하고, ,네째는 업장을 소멸하고 복덕을 성취하기 위하여 참회 발원하여야 하며, 다섯째는 불. 보살님의 명호를 부르며 정근하는 것 등이 있습니다.

염불
 염불이란 일반적으로 마음속으로 부처님을 항상 생각하는 것을 말합니다. 흔히 주위에서 ‘나무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나무석가모니불’, 등 부처님을 부르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잇을 것입니다. 이처럼 부처님께 귀의하고 모든 것을 부처님의 뜻에 따라 수행하는 것이 염불입니다. 염불에는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진리를 생각하는 법신염불과 부처님의 공덕이나 모습을 마음에 그려보는 관상(觀像)염불 ,그리고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는 칭염(稱念) 염불이 있습니다. 또한 염불은 모든 부처님을 마음속에 떠올리는 ‘통(通)염불’과 특정한 부처님만을 마음에 떠올리는‘별(別)염불’로 구별하기도 합니다.
염불하는 방법은 부처님을 그리워하면서 명호를 지극히 부르는 것입니다. 즉 언제나 부처님과 함께 하며 살기를 발원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염불을 하면서는 자신의 소리를 언제나 생생하게 들을 수 있어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음이 산란해져 입으로는 염불을 하면서 속으로는 번뇌, 망상, 잡생각을 하게 됩니다. 따라서 진심으로 부처님을 그리워하고 생각하는 과정에서 마음에 사심이나 탐욕이 사라지는 경지를 체험하는 것이 염불을 하는 진정한 의미인 것입니다.

정근(精勤)
 정근은 선법(善法)을 더욱 자라게 하고, 악법(惡法)을 멀리 여의려고 부지런히 쉬지 않고 수행한다는 뜻입니다. 이는 염불과 같이 한 마음 한 뜻으로 불. 보살님의 지혜와 공덕을 찬탄하면서 그 명호(名號)를 부르며 정진하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정근은 산란한 마음을 안정시켜 편안하게 하며 어떤 환경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맑고 밝아지게 하는 수행법입니다.
정근을 할 대에는 다른 생각을 다 놓아버리고 오직 평온한 마음으로 부처님의 한량없는 공덕을 믿고 일념으로 정진해야합니다. 불, 보살님의 명호를 부르면서 그 명호에 집착하거나 무엇인가 얻으려고 하면 정근에 장애가 됩니다. 항상 자세를 바르게 하고 기운을 안정시켜 몸을 흔들거나 경거망동하지 말아야하며, 음성은 너무 크게도 작게도 하지 말고 기운을 적당하게 하여 고르게 해야 합니다. 정근을 할 때 마음을 안정시키는 방법의 하나로 염주를 돌리거나 절을 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그리고 정근은 대상과 일정한 시간을 정하여 할 수도 있습니다. 대개 아침과 저녁으로 예불을 모실 때에는 석가모니불 또는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부르며 정근을 하고, 부처님 위신력에 의하여 서방정토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발원 할 때는 나무아미타불 또는 지장보살의 명호를 부르며 정근을 합니다.

간경(看經)
 불교에서 경전을 부처님의 말씀이요, 교훈이요, 진리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교경전은 단순한 책이 아니라 부처님의 진신 사리로서 불상이나 불탑과 같이 예배의 대상입니다.
뿐만 아니라 책이 귀하던 옛날에는 한 권의 경전을 갖는 의미가 각별했으며 경전을 통하여 모든 교육이 이루어졌으니 경전은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예로부터 우리 선인들이 경전을 통한 수행의 한 방법으로 간경에 지극한 정성을 보인 까닭도 이 때문입니다.
간경은 경전을 보고 읽는 것을 말합니다. 경전을 읽고 외우고 몸에 지님으로써 얻게 되는 공덕이 무한히 크기 때문에 간경은 수행의 한 방법으로 정착이 된 것입니다.
경전을 읽기 위해서는 먼저 몸을 깨끗이 하고 단정히 해야 합니다. 몸을 깨끗이 하는 것은 이 과정을 통해서 마음을 추슬러 경전의 의미를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입니다.
경전을 읽을 대에는 마음속으로 의미를 이해하면서 보아야 하는데 염불처럼 소리를 내어 읽기도 합니다. 이때는 염불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소리를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경전을 보면서 이해가 되지 않은 부분이 있으면 반드시 주위의 스님이나 선지식을 찾아서 그 뜻을 물어보고 넘어가는 것이 경전 읽기의 바른 방법입니다.

참선(參禪)

참선이란?
 불교의 수행법하면 가장 먼저 참선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참선은 익숙하게 생각되면서도 왠지 어렵게 느껴지기도 하는 수행법입니다.
참선은 앞서 공부해온 참회와 발원 그리고 기도 등과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앞의 것들이 다분히 외부 지향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면, 참선은 철저히 내부지향적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밖을 향해서 무언가를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돌이켜 비춘다는데 참선의 특징이 있습니다.
참선은 가장 불교적인 수행이라 할 수 있으며, 지금까지 해온 참회나 발원 혹은 기도 등도 결국은 참선을 제대로 하기 위한 준비과정 내지는 적은 단계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닙니다. 참회를 통해서 비워진 마음자리에 발원을 채움으로써 자기변화가 시작되었고, 기도를 통하여 강력한 변화를 체험하였다면, 이제 그 마음자리 자체를 밝히는 것이 바로 참선인 것입니다.
참선으로 대표되는 수행법의 종류에는 동남아시아 남방불교권의 수행법인 비파사나라는 수행법이 전해지고, 한국을 비롯한 중국, 일본 등 북방 불교 권에서는 선종의 화두(話頭)나 공안(公案)의 의미를 추구하는 간화선(看話禪)과 조용히 자신의 본성을 비추어보는 묵조선(黙 照禪)등의 수행법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참선이란 ‘선에 참입(叅入)한다. 는 뜻입니다. 참입이란 마치 물과 우유처럼 혼연일체가 된다는 의미이며 다른 말로는‘고요히 생각 한다’ 또는 ‘사유하여 닦는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참선의 진정한 의미는 ‘본마음. 참나’인 자성(自性)의 자리를 밝히는데 있습니다. ‘본 마음. 참나’는 어느 누구에게나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으며, 청정무구하여 일찍이 티끌세간 속에 있으면서도 물든 일이 없이 완전한 것입니다.
이러한 참 마음(自性淸淨心)에 관해서는 사실상 말로써 표현 할 수 없기 때문에 비유를 통해서 그 일단을 엿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일 례를 들어보자면 금강경에 관한 다섯 스님의 주석을 함께 모은<<금강경오가해>>에 다음과 같은 야보스님의 게송이 있습니다.
‘대나무 그림자 섬돌을 쓸어도 티끌하나 일지 않고, 달빛이 연못을 꿰뚫어도 흔적하나 남지 않네! ’
대나무 숲 사이로 바람이 훑고 지나가면 대나무가 움직일 때마다 마당에 비친 대나무 그림자도 함께 움직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림자가 마당과 섬돌을 쓸어내려도 마당 위의 티끌은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그림자가 아무리 움직인들 마당이 쓸어 질리는 없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보름밤의 교교한 달빛이 저 맑은 연못 밑바닥까지 환하게 비추어준다 하더라도 물에는 달빛이 뚫고 지나간 자취가 남은 까닭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록 세파에 찌들고 시달려 살아가는 인생이라 할지라도 본래의성품은 조금의 일그러짐도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본마음’이라고도 하며 ‘참나’ 라고도 하며, ‘자성청정심’이라고도 합니다.
참선은 이러한‘자성청정심’에 관한 확고한 믿음 내지는 인식 상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즉 내가 본래 완벽하다는 데서 출발하는 수행인 것입니다. 따라서 완벽을 향해서 나아가는 수행, 즉 불완전한 나를 완전한 나로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본래 완전한 나를 확인해 나아가는 길인 것입니다.
참선의 자세
참선수행을 한다고 하면 구체적으로 무었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참선은 ‘아무 생각도 안하는것’에서 시작됩니다. 디시 말하면 지금까지 해오던 이체의 사량 분별을 쉬는 데서 참다운 수행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음알이를 두지 말라’ 고도 하는데 알음알이란 지금까지 머릿속에 간직해온 온갖 지식과 분별 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옳고 저것은 그르다든가, 이것은 맞고 저것은 틀린다든가, 이것은 이익이 되고 저것은 손해가 된다는 등의 판단분별이 모두 알음알이에 불과한 것입니다.
참선을 하는 데는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지 않아야 하겠지만 처음 시작하는 사람은 조용한 곳이 좋습니다. 예를 들면 절에서는 부처님이 모셔진 법당이나 선방 등의 정해진 공간에서 하고 집이나 직장에서는 특별히 참선을 할 수 있는 장소가 없기 때문에 일정한 곳을 선택해서 하면 됩니다.
참선의 자세도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黙動靜)에 걸림 없이 자세를 취해도 되겠지만 전통 수행법인 결과부좌 나 반가부좌를 하는 것이 좋습니다. 결가부좌(結跏趺坐)와 반가부좌(半跏趺坐)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주위를 정리 정돈한 다음 좌복을 깔고 그 자리에 편하게 앉는다.
안ㅈ는 자세는 먼저 오른쪽 다리를 왼쪽 다리의 허벅지 위에 올려놓고 왼쪽 다리를 오른쪽
다리 위에 올려놓으면 된다. 허리와 양 어깨는 편한 상태로 쭉 펴고 두 손은 먼저 왼손 등을 오른손 위에 포개어 올려놓고 엄지와 엄지를 살짝 마주 닿게 하면 된다. 이 자세는 오랫동안 앉아서 수행하는데 적합합니다. 그러나 초보자는 다리에 쥐가 나는 등의 고통이 따를 수 있으므로 힘이 들 때에는 몸을 움직여서 굳은 자세를 유연하게 풀어 줄 필요가 있습니다. 익숙해 질 때까지 30-50분 등으로 시간을 정해 놓고 단계적으로 시간을 늘려 가는 것이 좋습니다. 또한 참선을 한다고 억지로 오래 앉아 있다 보면 몸에 무리가 생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때는 아쉬워 말고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법당이나 방안 또는 도량을 거닐면서 몸의 균형을 맞추어 조절해 주는 것이 좋습니다. 이것을 방선(放禪) 또는 경행(經行)이라고 합니다. 이 때에도 화두를 잊고 잡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방선 또한 참선의 연장이기 때문입니다. 반가부좌는 결부좌가 어려운 사람들에게 적합한 것으로 결부좌 자세에서 다리를 한 쪽만 다른 다리의 허벅지에 올려놓은 자세입니다. 특히 참선을 할 때에는 호흡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냥 마음대로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어서는 안 됩니다. 만약 그렇게 하면 마음이 답답하고 혼란스러워 집니다. 따라서 참선할 때 호흡은 단전호흡을 취하되 단전호흡법에 머무르면 안 됩니다.

다음의 순서로 한번 따라해 보십시오.
먼저 자세를 바르게 하고 거친 숨을 몇 번 몰아 쉰 다음 입으로 숨을 쉬는 것이 아니라 코로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쉽니다. 이 때 주의해야 할 것은 콧구멍이 미세한 털도 움직이지 않을  만큼 조용히 숨을 쉬어야 합니다. 그리고 호흡은 아랫배 즉 단전까지 내려 보냈다가 천천히 내쉬는 방법으로 계속하면 됩니다.

참선 수행의 유의점
 참선수행을 하면서 수행이 제대로 되고 있는지 스스로 확인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선 스스로 마음이 점차 너그러워지고 있는지 좁아지고 있는지 확인하면 됩니다.
시간이 갈수록 세간사에 담담해지고 공부가 재미가 나면 제대로 가고 있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참선을 하는 것은 ‘나’를 없애는 연습입니다. ‘작은 나’를 없애고 ‘큰 나’의 입장에서 살아가는 연습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부처님 앞에서 겸허해지고 공경임을 갖듯이, 집이나 직장에서 겸허함과 공경심으로 모든 이들을 대할 수 있다면 제대로 수행하는 것입니다. 또한 참선을 제대로 닦는 이라면 복 짓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복에는 유위(有爲)의 복과 무위의 복이 있어서 참선은 무위(無爲)의 복을 짓는 최상의 수행방법이긴 하지만, 선지식과 만남을 필 수로 하기 때문에 선지식과의 만남은 복 짓는 일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충분히 인식해야 하는 것입니다.
선지식은 그저 찾아다닌다고 해서 만나지는 것이 아닙니다. 유위의 복이든 무위의 복이든 열심히 짓고 있다보면 저절로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저 자신이 지은 복만큼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무한한 복을 지은 이에게는 무한한 선지식이 다가오며, 자그마한 복을 지은 이에게는 자그마한 선지식이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식이 없다고 탓할 일이 아니라, 자신의 복이 부족함을 인식하고 꾸준히 복을 지어나가야 할 것입니다.

 

지혜(智慧)와 자비(慈悲)의길-육바라밀(六婆羅密

매순간 우리는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가정에서는 가족과 친척, 학교에서 스승과 친구 그리고 직장에서는 동료와 상사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자신과 다르게 살아온 사람들과 함께 살다보면 본의 아니게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사람 사이의 갈등은 언제나 사소한 것에서부터 출발하여 나중에는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곤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너’ 와 ‘나’ 라는 상대적 입장에서 자기 것을 집착하는 어리석음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너와 내가 둘이 아닌 하나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우리가 무지에서 벗어나 진리를 발견하게 되면 결국 ‘너’ 와 ‘내’ 가 서로 나누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라는 하나로서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라는 공동체 의식을 가질 때 사람들과의 관계는 한층 가깝고 따뜻한 사이로 발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의 수행이 필요하고, 자신보다 나은 행동을 하는 사람을 보면 배우려는 자세로 나아가야 하며, 자신보다 못한 사람을 보면 자신도 과거에 그러했음을 반성하며 친절하게 일러주는 태도로 나아가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얕잡아 보는 행동은 어디서나 문제의 화근이 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에 불교에서는 다른 사람을 위해 헌신하는 적극적인 이타행의 여섯 가지 실천 행동으로 6바라밀을 말하고 있습니다.

 보시(布施)

여섯 가지 바라밀 중 첫째 바라밀은 보시(布施)입니다.

예부터 많은 사람에게 무엇이든지 베풀면 그 공덕으로 자신에게 좋은 과보가 돌아온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과 수행자 등을 만나면 자신의 복을 짓게 해준다고 믿고 기쁜 마음으로 베풀어 주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도움을 받는 사람을 福田 이라고 한 것입니다. 보시는 이렇게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것을 말합니다.

부처님은 깨달음에 이르신 후 고통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모든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 이 땅에 머무르셨습니다. 부처님께서 보이신 중생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본받아 다른 사람들에게 항상 연민과 사랑의 마음인 자비를 실천하는 것이 보이십니다.

보시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가 재시입니다. 財施는 물질적인 나눔과 베품입니다.

두 번째는 법시입니다. 法施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해주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진리의 말씀을 전해서 뭇 중생들이 무명으로부터 벗어나도록 도와주는 일입니다.

그다음은 무외시(無畏施)입니다. 두려움을 없애 주는 것. 상대방의 마음을 편하게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나는 재물도 없고 아는 것도 없어서 보시하려 해도 할 것이 없다고 하니는 분들은 무외시를 실천하면 되는 것입니다. 가진 것, 아는 것이 하나라도 부드럽게 가지는 것, 따뜻한 말 한마디가 바로 훌륭한 무외시인 것입니다.

자기 것을 다른 이에게 주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소우에 대한 강한 집착과 욕심으로부터 벗어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보시는 자신의 것을 남에게 기쁜 마음으로 베풀어주는 것입니다. 또한 보시는 우리의 집착과 그러 인해 생긴 모든 번뇌를 없애주는 길이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보시를 하려면 주는 이와 받는 이가 따로 있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이를 무주상(無住相)보시라고 하는데 무주상 보시는 내가 누구에게 얼마를 베푼다는 생각마저 텅 비워버린 보시를 말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세 가지가 청정해야합니다. 이것을 삼륜청정(三輪淸淨)이라고 하는데 즉 보시하는 사람과 보시하는 물건과 보시를 받는 사람, 이 셋이 모두 깨끗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부처님은 보시를 할 때 어떠한 보답을 바래서는 안 되며 심지어 자신이 남에게 보시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물질의 소유에 따라 사람의 가치가 달라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계(持戒)

두 번째가 지계파라밀입니다.

부처님의 생존해 계실 때, 전생의 과보로 열반에 들기 전에 등창이 생겨 고생했다고 하는 내용이 전생 담에 실려 있습니다. 이것은 깨달음에 이른 사람조차도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해서는 반드시 그 과보를 받게 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즉 알게 모르게 행하는 우리의 행동은 결국 다시 본인에게로 되돌아온다는 법칙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의 행위를 하더라도 조심하지 않으면 나중에 가서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동기나 과정이 어찌 되었든 결과만 좋으면 되지 않겠느냐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원인 없는 결과가 있을 수 없듯, 악한 행위에 좋은 결과도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행동은 내일의 모습을 결정합니다. 부처님은 우리가 행한 모든 행동은 결국 우리 자신에게로 돌아온다고 하셨습니다. 한 방울이 물이 모여 큰 항아리를 채우는 것과 같이, 우리가 ‘별거 아니겠지’ 라고 가볍게 생각하면서 저지른 악행이 결국 재앙의 원인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성인이 되면 자신의 행위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잠시라도 한눈을 팔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악행에 물든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좋은 행위는 쉽게 몸에 배이지 않지만, 나쁜 행위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자신의 마음과 말과 행동을 관찰하고 자신을 다스리는데 게을리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인욕(忍辱)

세 번째 인욕바라밀입니다. 인욕바라밀은 문자 그대로 참는 바라밀입니다. 살다보면 안으로부터 욕되고 어려운 것도 있을 것이고, 또 밖으로부터 주어지는 어려움도 있습니다. 인욕이란 그와 같은 욕됨을 잘 참으라는 것입니다.

불교를 흔히 수행의 종교라 합니다. 수행한다는 것은 모든 것을 참아가며 참 사람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참는다는 것은 탐내는 마음과 성내는 마음을 자제하는 것을 말하며, 탐내는 마음을 잘 참기위해서는 자신의 마음을 잘 이해하고 지켜보는 것이 필요하고, 성내는 마음을 잘 참기 위해서는  자신을 화나게 하는 사물이나 조건 혹은 상대방을 잘 이해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나로 하여금 분한 마음이 솟아오르게 하는 상대방이 있을 때에는, 그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를 이해하거나, 혹은 그가 잘못된 지식으로 인해 그와 같이 행동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상대방을 이해하는 마음도 생기고 저절로 참을성이 생겨나기도 할 것입니다.


정진(精進)

넷째, 정진 바라밀입니다.

바라밀은 생사의 고해를 건너 저 열반의 언덕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과거의 버릇이 얼마나 오래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가를 보여주는 속담에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바르게 실천하는 삶을 살려고 해도 과거의 탐욕에 길들여진 버릇을 하루아침에 털어버리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몸과 말과 마음의 수행이 어느 정도 되는가 싶다가도 금방 그것을 흔들고 허물어 버리려는 삼독심이 솟구치곤 합니다. 그러므로 보다 굳건한 마음으로 생활하면서 과거의 습관을 바꾸려는 노력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투철하게 깨달음을 이루어 다시는 어제의 생활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커다란 서원을 세우고 그 길을 용감하게 가는 길이 중요합니다. 반복하여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그보다 더 끈질기게 다시 떨치고 일어나는 용맹한 정진심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깨달음을 이루고 못 이루는 것도 정진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행위의 결과를 미리 예측해 보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결과에 어떤 과보를 받을지를 안다면 정진에 많은 장애를 극복하게 될 것입니다. 더욱 열심히 깨달음의 길을 향해 정진해야만 어제와 다른 내일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선정(禪定)

다섯 번째,선정바라밀입니다.

선정은 생각 자체를 비우고 조용하게 하는 수행이며 공부입니다. 선정은 개인의 수행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도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싸움도 상대가 있어야 하는 법인데 내가 먼저 인욕하고 깊이 있은 생각으로 모든 행동을 차분하게 처리한다면 상대방도 다투려는 마음보다는 평온한 마음으로 상대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깊이 생각하는 힘을 길러주는 수행인 선정을 닦아야 합니다.

선정은 지혜로 나가는 길입니다. 그 길은 머리가 좋은 사람만이 가는 것도 아니고 학벌과 학위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누구든지 어떤 것에 대한 관심을 갖고 깊이 생각함으로써 자신이 그 동안 보지도 알지도 못했던 전체의 모습과 나와 남으로 나눌 수 없는 하나로 연결된 삶의 전 과정이 드러나고, 그 속에서 지킬 것과 얻을 것, 버릴 것 등을 바르게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혜(智慧)_반야(般若)

마지막으로 지혜바라밀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의 삶을 건강하고 아름답게 꽃피울 뿐만 아니라 주위의 사람들에게도 좋은 향기를 줍니다. 마치 언덕에 곱게 핀 꽃이 그윽한 향기를 바람에 실어 그 향기가 오가는 사람들에게 베풀어주듯이, 지혜로운 사람들 곁에 사는 삶은 나와 이웃, 그리고 자연의 세계를 정화시키는 감로의 물줄기가 될 것입니다.

실제 육바라밀 중에 지혜의 완성이 이루어져야 만이 다른 바라밀도 완성됩니다. 보시바라밀도 지혜가 있어야 완성되고 지계바라밀도 지혜의 눈이 따라야 완성됩니다. 다른 바라밀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육바라밀은 서로 격리되어 있는 실천 덕목이 아닙니다.


출처: 글: 대한불교조계종 포교연구실  ,  워드: 본인

 

 

추가된 내용
rlacjftjs195
2009.05.13 16:07 추가
. 탄생

부처님은 히말라야 기슭의 작은 부족국가 카필라바스투에서 태어나셨다. 왕비 마야부인은 당시의 풍습에 따라 아이를 낳기 위해 친정으로 가던 중 작은 구릉에서 아기를 낳았다. 여기가 바로 룸비니이다. 룸비니는 지금도 부처님의 탄생설화와 유적을 간직한 채 네팔 정부 그리고 네팔 승려와 티벳 승려들에 의해 수호되고 있다.
그리고 룸비니에서 서쪽으로 14∼15Km 지점에 부처님의 고향인 카필라바스투가 있고 거기서 남동쪽 10Km 지점에 석가족의 도시와 승원터가 남아있는 피프라하와가 있다.

2. 성장
마야부인은 태자가 태어난 지 일주일 만에 돌아가셨다. 태자는 이모인 마하파자파티 부인의 손에서 양육되었다. 이 분이 뒷날 최초의 비구니가 된 여성이다. 태자는 정신과 육체가 비범한 청년으로 성장했다. 그를 가르친 스승들은 한결같이 그의 총명과 지성에 압도 당하곤 했다. 아름다운 야쇼다라와 결혼도 했으므로 부왕인 슛도다나 왕은 몹시 기뻐했다. 그러나 그는 한편으론 여전히 불안했다. 태자의 성격이 극히 명상적이고 도무지 현실적인 것들에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왕은 태자가 태어나고 찾아왔던 아시타 선인의 말이 늘 마음에 걸렸다. "이 분은 세속에 있으면 '전륜성왕'이 될 것이요, 출가하면 대법왕인 부처님이 될 것이다. 슬프다. 나는 늙어 그 때를 볼 수 없으니."라고 한 말이었다.
카필라 왕국은 몹시 강대한 나라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나라는 젊고 유능한 지도자를 필요로 했다.

3. 출가
대개의 불전작가들은 태자의 출가를 "미리 예정되어 있던 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처리방식이라면 태자의 고뇌가 인간적으로 가슴에 와닿지 않는 결점이 있다. 불교가 철저하게 인본주의를 바탕으로 발달해온 만큼, 태자의 출가를 이해하는 우리들의 태도 역시 싯달타의 정신적 고뇌를 이해하려는 개인사적 시각을 지녀야 하지 않을까 한다.
태자의 고뇌는 무엇이었을까. 『불소행찬』의 서술들이 비교적 구체적인 것으로 보여진다. 또한 "농경제에서의 충격", "나무 아래서의 명상", "사문유관" 등이 태자의 고뇌와 출가 동기에 대한 대표적인 얘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4. 수행의 편력
기원 전 6세기, 부처님의 생존 시에 마가다 왕국은 갠지즈 강 중류에 강력한 제국의 기초를 건설하고 있었다. 또한 이 시기는 새로운 종교가 꽃을 피운 시대였다. 인도 3대 종교의 하나인 자이나교의 창시자 마하비라도 이 시기에 바이샬리에서 태어났다.
부처님의 출가행로는 이 마가다국의 서울 라자그리하를 향하고 있었다. 도중에 수많은 선지식을 만났지만 대표적인 수행자는 아라라 칼라마와 우드라카 라마푸트라다. 그들은 각기 많은 제자들을 거느린 훌륭한 종교 지도자들이었다. 궁극적인 깨달음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이들에게서 수행의 기초와 정신상의 여러 가지 단계들의 가르침을 받았다. 이들의 학설이 초기 경전에는 자주 등장한다.

5. 성도
라호르 박물관에 있는 "태자의 고행상"이 보여 주는 것처럼 부처님은 지독한 고행을 계속하고 있었다. 부처님은 라자그리하를 떠나 가야의 산에 머물고 계셨다. 결국 그는 고행을 끝내기로 결심했다. 함께 하던 다섯 명의 수행자들로부터 빠져 나왔다. 뒷날 "양 극단에 머물지 말라"고 가르친 가르침도 이 때 얻으신 경험이었다.
전정각산을 거쳐 나이란자라 언덕에서 수자타의 우유죽으로 정신을 차린 후 보드가야 큰 보리수 아래를 수행처로 삼고 보편적인 수행생활로 들어갔다. 좌선의 명상법이었다.
어느날 새벽별을 보며 의심이 없는 확실한 경지에 도달했다. "무상정각無上正覺"을 얻어 부처가 된 것이다. 동·서학자들이 "지고한 통찰력"이라고 부르는, 인류의 교사로서 명실상부한 성자의 안목을 얻으셨던 것이다. 부처님의 일생체험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이 대목에 대한 경전의 서술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그리하여 내게 지견智見이 생겼다. 나의 해탈은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내 마지막 생애이고 이 이상 다시 태어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생은 이미 다하고 청정한 수행은 이루어져 소작도 죄도 다 가려졌네. 다시 유有를 받지 않으며 진여를 알다." <불타 석가모니>

"더러움은 모두 없어져 버렸다. 더러움의 흐름은 모두 멎었다. 이 이상 태어나는 길을 따르지 않으리. 이것을 고뇌의 최후라고 이름한다." <잡아함, 열반경>

6. 최초의 설법
정각을 이루신 부처님은 여행을 떠나 녹야원에서 함께 수행하던 다섯 동료 수행자에게 최초의 설법을 행하신다. 드디어 법왕의 법이 굴러가기 시작한 것이다. 보드가야에서 녹야원이 있는 바라나시까지는 240여 Km, 당시 여정으로는 짧은 거리가 아니다.

부처님은 깨달으신 다음에도 정진을 계속하셨으며,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끊임없이 설법 여행을 계속했다. 또한 부처님의 말씀은 너무나 개혁적이어서 법문을 받아들이기에 누구나 주저하지 않을 수 없었다.

7. 죽림정사와 기원정사
현존하는 건물이 남아있는 것은 아니지만, 부처님에 관한 유적은 여러 지방에 걸쳐 남아있다. 그중에서도 교단사적인 측면에서 라지기르의 죽림정사와 쉬라바스티의 기원정사가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죽림정사는 승단 최초의 정사로 의의가 크며 입멸 후 이곳 근처에서 최초의 경전 결집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기원정사는 부처님의 고향이 가까운 인도 중북부 평원에 자리잡고 있다. 이곳에서 부처님은 스물다섯 번의 우기를 지내셨다. 또한 이곳은 당시 코살라국의 서울로 아요드야, 코삼비, 카필라 등 부족국가를 예속시키고 있던 정치중심지였다.

아함경의 대부분 경전이 여기에서 설해졌고 우리가 수지독송하는 금강경을 비롯해 수많은 경전이 기원정사에서 탄생되었다. 7세기 중국의 현장 삼장이 이곳을 순례했을 때만 해도 승려와 가람으로 활기찬 곳이었으나 12∼13세기 이교도의 침입으로 퇴락, 지금은 유적의 형태만 스리랑카와 버마 승려들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

8. 부처님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은 매우 합리적이어서 이성적으로 이해하기 쉽다는 느낌을 받는다. 따라서 분석적이고 논리적이라는 귀결에 이르게 된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일어나므로 해서 이것이 일어난다는 '연기론'은 세계를 이해하는 중심 테마이지만 거기서 한 걸음 나아가 열반 즉 평온 에 이르는 네 단계의 성스런 관찰을 통해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언어, 바른 행위, 바른 삶, 바른 정진, 바른 생각, 바른 선정을 실천하도록 가르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합리적 사고로 출발하고 이성적 비판을 거쳐 완전한 결론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말씀들은 매우 쉽고 간결하며 다양하다. 이것은 민족과 사상에 구애받지 않고 인간이면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융화적인 태도이다. 불교는 생명력 있는 사고만이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다.

9. 열반
길에서 길로, 오직 법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맨발로 걸었던 부처님에게도 육체의 죽음은 다가오고 있었다. 부처님의 마지막 1년은 공교롭게도 출가의 여정을 되짚어 오는 것이었다. 망고나무 우거진 언덕에서 바이샬리를 돌아보며 "아난아 이제 바이샬리를 보는 것도 이것이 마지막이다."라고 예언하셨다. 가르침이 세계로 뻗어나간 부처님의 열반은 매우 조용하고 평화스럽게 이루어진다.
"스스로를 등불로 삼고 법을 등불로 삼으라"는 말씀을 남기시며 쿠시나가라에서 열반에 드신다.
화장하고 나온 사리와 숯은 일곱 나라의 왕과 한 사람의 바라문이 각기 자기 나라로 가져가 탑을 모셔 봉안했다. 바이샬리의 마지막 안거에서 제자들에게 하신 마지막 법문도 그렇거니와 열반경에 기록된 마지막 말씀은 매우 짧고 간결한 것이었다.

"모든 현상은 변천한다. 게으름 없이 정진하라."
     
     
     
     

출처 : [기타] "http://www.traveler.pe.ky/"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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