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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 文化參考

[스크랩] `이순신`과 `원균` 비교할 수 없는 대상

鶴山 徐 仁 2007. 12. 30. 10:38
'이순신'과 '원균' 비교할 수 없는 대상  



 이순신이 부임한 전라좌수영은 전함 25척과 해군 4000여명으로 편제된 해군 기지로 경상우수영이나 경상좌수영의 각 75척 12000여명에 비해 작은 규모였다. 이순신은 부임하자 부실하게 관리되던 병기고를 점검하고 함선과 좌수영의 성(城)과 해자(垓子), 봉화대 등을 보수하는 등과 함께 왜에 잡혀갔었거나 다른 경로로 왜에 대해 알고 있는 병사들을 통해 왜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해이해 진 기강을 바로잡아 나갔다. 또 좌수영 앞의 돌산도(突山島)와의 사이에 수중 장애물을 설치한다.

이 장애물은 돌산도와 좌수영 사이 진입 수로 중 한 곳을 막아 적은 병력을 반대쪽에 집중 배치함으로써 방어 효율을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 이 수로를 무슬목(無膝項)이라 부른다.이러한 이순신의 전쟁 준비는 대단히 위험한 것으로 이때까지도 선조는 왜의 침략이 없을 것이라 하였기 때문에 잘못하면 역적으로 몰릴 수도 있는 것이었다.

이때의 준비에서 군관인 이봉수(李鳳壽)는 최무선의 화약 제조법을 더욱 개량하며 대량 생산할 방법을 연구하고 이를 비축하였고, 정걸은 판옥선과 거북선을 개발하면서 이외에 새로운 불화살, 철익전, 대총통 등의 무기를 발명해 전란에 대비하였다.이렇게 전란을 준비하는 동안 1592년이 되었다. 이해에 이순신이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되기 직전, 이 자리에 임명되었다가 사간원의 반대로 변방으로 쫓겨 갔던, 원균(元均)이 경상우도수군절도사에 임명되어 2월에 부임하였다. 또 이순신과 같은 해에 전라우도수군절도사에 임명된 이억기(李億?)는 후에 전란이 발생하자 이순신을 도와 나라를 지키는데 큰 공을 세우게 된다.

그러나 이런 겉보기의 상황과는 달리 대부분의 수군은 그 준비 상태가 형편없었다. 미리부터 준비하던 전라좌수영은 전란에 대해 대비가 되어 있었으나, 다른 군영들의 상태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특히 원균이 부임한 경상우수영은 전임 수사의 관리 소홀로 전함들은 기동이 가능한 것이 거의 없었고, 병사는 수백 명의 오합지졸들뿐이었던 것이다. 이것을 살핀 원균은 이를 바로 잡기보다는 주색잡기에 빠져 허송세월을 하고 있었고, 이는 다른 군영들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이 당시 조선의 군벌이 얼마나 부패했고, 국왕인 선조가 군사력에 대해 얼마나 소홀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때 일본에서는 전쟁을 위한 준비가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1591년 3월 9일,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중신들과의 회의에서 조선 침략을 결정했다. 조선 통신사 일행이 일본을 떠난 지 약 4개월이 지난 시점이었다. 이 회의의 결과에 따라 전국의 영주들에게 즉각 선박 건조 할당량이 주어졌고, 1년 후인 1592년 3월 15일을 기하여 히데요시의 병력 동원령이 포고되었다. 이에 따라 전국의 영주들은 병사의 징집과 보급품의 징발을 시행하여 정규군 30만 7천명과 10만 이상의 잡역부와 노수(수군의 노 젓는 이) 등 도합 40만여 명의 병력이 동원되었다.

3월 16일 히데요시는 교토를 출발해 새로 건립한 나고야성으로 향했다. 이 나고야성이 조선 침략 전선의 총본부로 사용될 예정이었으며, 곧이어 나고야성에 머무를 예비군과 조선으로 출병할 군단들이 연속적으로 출발하여, 일본 역사상 최대의 군행렬이 4월 6일까지 계속되었다.

(일본군 조선 침략군 편제
* 조선 출정군은 모두 9개 군으로 나뉘었다.

제1군 : 고니시 유키나가 - 18700명
제2군 : 가토 기요마사 - 20800명
제3군 : 구로다 나가마사 - 12000명
제4군 ; 시마즈 요시히로 - 15000명
제5군 : 후쿠시마 마사노리 - 24700명
제6군 :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 15700명
제7군 : 모리 테루모도 - 30000명
제8군 : 우키다 히데이에 - 10000명
제9군 ; 하시바 히데카스 - 11500명 등
총 15만 8천8백 명으로 이외의 15만 병력도 계속해서 조선에 투입되게 된다.)}

실제 조선 침략의 선봉장은 당시 나이 40세의 천주교 신자인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38세의 불교 신자인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로, 각각 ‘십자가’와 ‘나무묘법연화경’을 새긴 군기를 사용하면서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 이들은 4월 2일 오전 8시 유키나가군 1만 8천명이 선두로 출발하고 이어 기요마사의 제2군이 출발, 4월 2일 저녁 일기도(壹岐島)의 가쓰모토 항에 도착하였다.4월 7일 밤 그 동안 역풍에 곤란을 겪다가 간신히 대마도의 완노우라항에 입항한 후 수일간 대기, 4월 10일 밤에 바람이 순풍으로 바뀌자 유키나가는 야간에 출항 명령을 내려 4월 12일 이른 새벽에 부산포에 도착하게 된다.

1592년 4월 12일의 이른 새벽에 부산포의 첨절제사 정발(鄭撥)은 병졸 몇을 데리고 자신의 관내를 순찰하고 있었다. 정발 장군은 25세에 궁마(弓馬)로 무과에 급제한 후 36년간 변방만을 돌며 무인으로 살아오다 60세를 맞은 노장이었다. 정발과 그의 일행이 부산진성(釜山鎭城)을 나와 절영도(영도)에 도착했을 때 바다 위로 수백 척의 선단이 다가오는 것을 발견했다. 왜적의 침입임을 직감한 정발은 즉시 부산진성으로 돌아가 휘하 병사 700여 명에게 전투태세를 명하였다. 마침내 임진왜란(壬辰倭亂: 일본에서는 문록의 역[文祿의 役]) 7년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새벽안개를 뚫고 유키나가가 지휘하는 제 1군 18,700여 명은 빠른 속도로 부산포 상륙 작전을 마쳤다. 언덕 위의 부산진성에서 왜군의 상륙을 지켜보던 정발은 아연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휘하 700여 명으로는 도저히 막을 수 없을 것 같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장수된 자로서 부산진성을 그대로 내어줄 수는 없었다. 무조건 항복하라는 유키나가의 협박에 분노한 정발 첨사는 휘하 700여 명의 병사들과 함께 결사적으로 왜적에 대항했다.

유키나가의 제 1군은 유키나가의 직속군 7000여 명과 그의 사위이면서 대마도주의 아들인 요시토모가 이끄는 5000여 명의 해적, 마쓰우라 시게노부의 해적 군대 3000여 명, 아리마 하루노부의 2000명, 오무라 요시사키의 1000명, 고지마 스미하루의 700명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중 대마도주의 아들 요시토모는 조선의 속령으로서 일본과 조선의 눈치를 살피다 히데요시 편에 붙어 이번 전쟁에 참가한 것이었다. 따라서 부산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고, 그의 안내에 따라 유키나가군은 서슴없이 부산진성을 공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많은 유키나가의 제 1군을 결사적으로 막던 정발은 뒤이은 기요마사의 제 2군을 보고 더 이상 자신의 힘으로는 부산진성을 막아 낼 수 없음을 알았다. 부산진성에서 혈전을 벌이고 있는 정발을 지원키 위해 달려온 다대포 첨사 윤홍신과 함께 사투를 벌이던 부산진성의 수비군은 결국 모두 전사하게 된다.

전투가 시작된 지 2시간만으로, 단 700명의 병력이었던 정발장군의 부대가 얼마나 치열하게 항전을 했었는지 알 수 있다. 이때 경상 좌수사 박홍은 전함 75척과 협선 등 100여 척에 달하는 함대와 12,000에 달하는 병사를 지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병의 출현과 함께 동래로 도망쳤고, 유키나가군이 부산진성의 본진인 동래성으로 향하자 또 다시 도망쳐 버렸다.


이때 동래성의 방위를 맡던 경상좌병사 이각도 겁을 먹고 달아나 버렸다. 그나마 박홍은 도망치기 전에 부하들을 각 수영(水營)에 보내 왜침을 통보하도록 하고 파발마를 서울로 띄웠다. 이후 박홍은 부끄러워 산속에 숨어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어쨌든 유키나가의 왜병들이 동래성으로 진군하자 동래 부사인 송상현(宋象賢)과 양산 군수 조영규, 홍윤관, 송봉수, 노개방 등의 장수들이 결사 항전을 다지고 결전을 벌였으나 결국 패하고 만다. 부산포에 왜군이 상륙한 4월 12일에서 단 이틀이 지난 4월 14일의 일이었다. 이때 박홍이 버린 경상좌수군은 그대로 흩어져 버렸으며, 4월 15일 오전 10시에 박홍이 보낸 사자가 경상우수영에 도착하여 원균에게 왜침을 알리고, 다음날 오후 10시에 원균의 통보로 이순신도 이를 알게 된다.

박홍의 또 다른 사자는 4월 16일 오후에 경상관찰사 김수에게 왜침을 알리게 된다. 이에 김수 관찰사는 4월 17일 파발을 띄워 전라좌수군이 경상도 경내로 월경할 수 있도록 긴급 요청하고, 4월 19일 김수의 왜침 통보가 이순신에게 전해진다. 이에 앞서 4월 18일에는 김수가 원균에게 출전을 명령한다. 4월 27일 오후 7시에 조정에서 내려온 파발은 이순신의 함대가 경상도로 월경해도 좋다는 허가와 함께 작전권을 이순신에게 부여하게 된다.

긴박하게 조치되는 동안 부산진과 동래를 함락시킨 유키나가의 제 1군은 양산을 거쳐 서울로 향하고, 기요마사의 2군도 경주를 거쳐 서울로 향했다. 그리고 구로다 나가마사의 제 3군이 4월 30일 김해부(지금의 김해)로 침공하고 나가마사의 일부 군대는 5월 2-3일에 거쳐 합포(마산)와 웅포(진해)를 침공하게 된다. 연이어 5월 7일에는 경상우수영이 있는 거제도의 북단에 위치한 옥포와 승포에도 나가마사의 3군이 침공하였다.

4월 18일 경상관찰사 김수로부터 출전 명령을 받은 경상우수영의 원균은 전혀 정비하지 못한 자신을 책망했으나 이미 늦었다. 경상우수영에는 출전할 수 있는 함선과 병력, 무기가 전무하다시피 했던 것이다.

이에 원균은 4월 19일 전투를 포기하고 관내의 창고를 불태워 모든 군사 기밀 문서를 없애고, 경상우수영의 함대 73척 중 기동이 어려운 전함 40척과 협선 17척 등 모두 67척을 바다에 수장시켜 버렸다. 그리고는 남은 함선을 끌고 사천(泗川)으로 도망쳤다.

왜침 하루전인 4월 11일에 이순신의 전라좌수영에서는 정걸과 나대용이 중심이 되어 개량해 온판옥선(전함)에 뚜껑과 용머리를 달고,돛과 대포를 설치

한 거북선의 완성이 있었다. 왜침이 시작된 4월 12일 오전에는 거북선의 진수식이 거행되었다. 이 배의 이름은 귀선(龜船:거북선)이라 명명되었다. 거북선은 길이가 27.6m이고 머리에서 꼬리까지는 무려 33.7m에 이르며 너비는 9.2-10.4m이고 높이는 6.6m에 달하는 거선이었다.



또 승선인원은 선격, 무사, 타공, 요수, 정수 등이 각 2명씩이고 사부, 화포장, 포수 등 포병이 52명, 노 젓는 이가 100명인데 그 중 80명은 거북선 좌우현의 노 8자루씩 모두 16자루에 전속되어 있고, 20명은 예비병이었다. 이때 노는 한 자루당 노장 1명과 노수 4명이 담당하는 것이다.

전투시에는 전원이 달라붙어 전함의 기동력을 극대화하게 된다. 이외에 주요 화력으로 좌우 방패판에 22개씩의 총구멍이 있고, 거북 머리에도 2개의 소포 구멍이 있으며, 아래 양쪽에는 대포 구멍이 2개 있다. 또 배 양편에 12개의 대포 구멍이 있고 꼬리쪽에도 포 구멍이 마련되어 있다.


거북선의 주포로는 천자(天字), 지자(地字), 현자(玄字), 황자(黃字) 총통(銃筒)이 있었다. 그중 가장 작은 황자총통은 전함의 거북 머리 속에 숨겨 두었다가 전투 중, 적의 대장선 밑을 파고들어 포를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적장을 격살하는 특수 목적에 사용되었다. 가장 큰 천자총통은 1290근의 무게이며, 한번에 사용되는 화약은 30근에 달하는 대구경 포였다. 수철연의환(水鐵鉛衣丸)이라 부르는 탄체를 발사할 경우 그 도달 거리가 10리(4Km)에 달했고, 조란환(鳥卵丸)을 사용하는 경우 한 번에 300발을 발사할 수 있는 대량 살상무기이다.

이런 신무기인 거북선이 진수식을 하고 이순신이 승선하여 판옥선 등과 함께 함재포를 쏘아보며 해전 연습에 들어가기 몇 시간 전에, 부산에서는 왜적들의 침공이 있었던 것은 대단한 우연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로부터 4일 후 이순신은 원균에게 왜침을 통보 받았고, 19일에는 김수 관찰사로부터의 연락도 받은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은 전라좌수영을 벗어나 경상도 지역으로 이동해도 좋다는 상부의 연락을 기다리며 한발자국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는 앞서 설명한 통신체계가 갖춰지지 않은 상태의 중앙 집중적 군사 지휘체제가 갖는 가장 취약한 약점인 것이다. 김수 관찰사의 월경 요청과 왜침 보고는 4월 17일 오전에야 한성에 도착했고, 선조가 불참한 가운데 열린 회의에서 월경 허락과 원균과의 합동 작전이 결정되어 이것이 이순신에게 통보된 것은 무려 10일이 지난 4월 27일 오후 7시였다.

* 당시 왕권의 명령없이 병력을 움직일 수 없었던 이순신이 움직일 수 있게 되는데 전쟁 발발 후 15일, 김수관찰사에 의한 요청이 있은 후 10일이 걸렸다는 점은, 허울좋은 왕권강화가 국력의 저하를 초래하고, 이것이 조선을 명의 속국으로 전락시킨 이유가 되고 만 결정적인 실증이 될 것이다.

이에 이순신은 곧바로 원균에게 이 내용을 알리고 서로 만날 장소를 문의하였다. 원균의 파발은 4월 29일 정오에 도착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왜적의 규모는 5백 척 정도이다.
2. 적선이 현재 정박하고 있는 곳은 부산, 김해, 양산강, 명지도 등이다.
3. 경상우수군이 적선 10척을 격침시켰다.(이 부분은 원균의 거짓말이다.)
4. 적은 많고 아군은 적어서 결국 이를 막지 못하고 경상우수영이 적에게 함락되었다.
5. 만날 장소는 당포(경남 통영군 신양면 산덕리)로 정한다.

등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이순신은 사태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심각해 처음 계획한 원균과의 연합 작전도 경상우수영의 괴멸로 말미암아 불가능하고, 단독으로 적을 제압하기에는 적의 수가 너무 많아 불가능함을 깨닫게 된다. 500척의 적에 맞서 자신의 24척만으로 어떻게 싸울 것인가? 이순신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 이순신의 요청을 받은 전라도 순찰사 이광(李洸)은 전라우수영에 명하여 이순신을 지원하도록 했다. 이에 전라우도수군절도사 이억기는 그의 함대를 이끌고 즉각 출동하겠다는 공문을 보내왔다

이순신은 출전 준비를 마치고 이억기의 함대가 도착하기만을 기다렸으나 늦어지자 5월 4일 단독으로 출전을 명한다. 이 첫 출전에는 전라좌수영의 모든 함선이 망라되었는데 전투함인 판옥선이 23척, 신무기인 거북선이 1척, 연락선인 협선이 15척, 위장용 전선인 포작선이 46척 등 총 85척이었다. 그러나 실전에 사용될 수 있는 판옥선과 거북선은 24척에 불과해 500여척의 대선단인 왜군을 막기에는 역부족인 모습이었다.

첫 출전에서 이순신의 함대는 이미 달아나 버린 각지의 군관들을 불러 모았으나 후방의 군관들 중 달아난 자가 많아 배후로부터의 공격에 대비하며 전진해야 했다. 이에 이순신은 척후선을 좌우 2개의 수색조로 편성해 운영하면서 전진해 갔다. 이순신은 5월 5일 당포 앞바다에 도착해 원균과 합류하여 왜적을 요격하려 하였으나, 원균은 나타나지 않다가 다음날 오전 8시가 되어서야 단 1척의 전함만을 끌고 나타났다.

기대했던 원균의 함대가 완전히 전멸했음을 안 이순신은 경악했으나 실망만 하고 있지는 않았다. 다행히 원균의 부하 중 원균의 눈을 피해 숨겨 둔 군함을 타고 나타난 남해 현령 기효근과 영등포 만호 우치적, 옥포 만호 이운룡 등이 합류하여 경상우수영의 전함은 4척이 되었다. 따라서 함대는 전함 28척과 협선 27척으로 늘어났다.

비록 이름뿐인 경상우수군 함대와의 합류였으나 형식적으로는 연합함대를 구성하게된 것이다. 수색을 계속한 끝에 5월 7일 거제도 옥포 앞바다에서 우척후선 선장 김완, 좌척후선 선장 김인영이 옥포만에 정박중인 왜 선단을 발견하는데 성공한다. 이때까지 입수한 정보로 왜의 함선은 처음의 500척보다 훨씬 많은 700여척으로 파악되고 있었으므로 700대 28의 불가능한 해전을 각오한 것이었다.

5월 7일 정오경 옥포 앞바다를 돌아선 척후선으로부터 3발의 신기전(神機箭)이 발사되었다. 적을 발견했다는 신호이면서 적선이 30척으로 보인다는 뜻이기도 했다. 돌연 병사들이 술렁대기 시작했다. 이때 이순신은 ‘함부로 행동하지 말고, 침착하고 신중하기를 산과 같이 하라’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옥포만에 정박하고 있던 왜함대는 도도 다카토리와 호리우치 우치요시 함대의 연합함대로 남해의 해로를 여는 정예의 최선봉 함대였다. 이들은 부산진과 김해를 함락시키고 5월 6일 10시경 율포를 유린한 후 5월 7일 아침에 이곳 옥포에 도착한 것이었다. 이들은 이곳까지 오는 동안 조선 수군을 찾아볼 수 없었으므로 승리의 자축연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조선 수군이 접근하는 것을 보자 잠시 당황했으나 그 수효가 30척 안팎에 불과하자 호기있게 자신들의 함대 50척을 출동시켰다. 당시의 해전 방식은 전 세계 어느 곳이나 접현전(接舷戰)이었다. 즉 멀리서 대형 화포를 발사하여 손실을 입힌 다음, 서서히 접근하면서 봉화시(烽火矢:불화살)로 교전을 벌이다, 배를 밀착시켜 백병전으로 승부를 가리는 방식인 것이다.

백병전을 당연시 한 일본군은 함대를 어려진(魚儷陣:몰려 다니는 물고기 모양)으로 펴고 조선 함대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 진형은 일단 충돌하면 배를 옮겨다니며 백병전을 벌이기 좋은 형태였다. 그런데 이순신의 함대는 포구에 들어서면서 양쪽으로 갈라져 일본 함대를 에워싸듯이 움직이는 것이 아닌가? 이것이 소위 이순신의 독창적인 전법인 학익진의 형태였다. 학익진(鶴翼陣)은 학이 날개를 펼친 듯한 형태인데, 어려진의 적에게 중앙을 돌파당하면 집중된 적의 병력에 비해 분산된 병력 배치가 되어 백병전으로는 승산이 없는 형태였다.

일본 함대의 다카토라에게는 이것이 조선 해군이 전혀 경험이 없거나 이미 겁을 먹고 달아나는 것처럼 보였다. 더욱 맹렬하게 달려들던 다카토라의 함대가 이순신 함대의 기함에 바짝 접근했을 때 갑자기 조선 함대 속에서 이상하게 생긴 배 한 척이 빠르게 튀어나와 입 속에서 대포를 발사하기 시작했다. 다카토라의 최선봉 전함은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이고 말았다. 바로 거북선의 돌격 전술이었다. 더구나 일본 함대의 입장에서는 거북선의 모양은 접현전을 시도할 수 없는 형태였다.

조선 해군과의 첫 전투에서 패할 수 없었던 다카토라는 부하들을 격려하며 전력을 다해 전투를 지휘하여 조선의 전함에 기어오르도록 하였으나, 그때마다 200여개의 산탄이 발사되거나 발화탄을 맞아 병사들이 대량으로 쓰러지거나 배에 불이 붙어 도저히 싸울 수가 없었다. 차츰 일본 해군의 전투력은 상실되어 갔고 결국 다카토라의 함대는 패하고 말았다.

지휘관인 다카토라는 기함이 격침되면서 물에 뛰어들어 인근의 섬으로 피했다가 수일만에 뗏목을 타고 간신히 탈출하였고, 50척의 일본 함대는 대전함 16척, 중군함 8척, 소선 2척 등 총 26척이 격침되고 일본 수군 4080명이 도살되었다. 이때 이순신의 함대는 전선 피해 및 전사자가 전무하고 부상자가 단 2명 있을 뿐이었다. 이순신 함대의 첫 번째 전투인 옥포 해전은 옥포 주민들의 관전하에 진행되어 민심을 크게 진작시켜 주어 또 다른 의미가 있는 전투였다.

이때 사용된 학익진은 이순신의 전술인 정(丁)자 타법을 효율적으로 구사하기 위한 진형으로 전함의 함포를 최대한 적극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방법이다. 즉 달려드는 적선에 아군의 함선을 가로막듯 돌려 정(丁)자 형태를 만들고 적이 전방의 포를 1-2문 사용할 때 우리는 측면의 포 10문을 동시해 발사해 10대 1의 우위를 점하는 방법인 것이다. 이는 당연히 정밀한 함포 발사 기술과 체계적인 함포의 연구가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당시의 해전 전술이 함포를 이용해 대충 발사하면서, 경미한 타격을 입히고는 곧바로 접현을 통해 백병전을 벌이던 것에 비해, 접현을 아예 허용하지 않고 함포만으로 요격하는 것은 일반인으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못할 전술인 것이다.

이 정(丁)자 타법은 300년이 지난 1905년 5월 일본의 도쿄헤이 하치로 제독에 의해 다시 한번 계승되었다. 하치로 제독은 러시아의 발틱 함대를 상대하여 일본의 국운을 걸고 일전을 벌여 승리함으로써 일본의 영웅으로 지금까지 추앙 받는 사람이다.

하치로는 임진왜란의 일방적인 패배를 깊이 연구하여 마침내 이순신의 학익진과 정(丁)자 타법의 비밀을 알아내었고, 이를 러시아의 발틱 함대와의 전투에 응용함으로써 승리한 것이다. 이를 일본에서는 T자 전법이라 부른다. 하치로는 이 전투에서 승리한 후 이순신을 군신(軍神)으로 섬겼다고 한다

번째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이순신 함대는 정자 타법의 자신감과 함께 사기까지 충천하여 연이어 합포, 적진포 등에서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어 다음과 같은 전과를 기록하게 된다.

이순신 함대 1차 출전 전과

참전 전함 : 조선 - 27척
일본 - 옥포 35척, 합포 5척, 적진포 13척 등 총 53척
격침 : 조선 - 없음
일본 - 총 42척
전사자 : 조선 - 없음
일본 - 6920여 명
부상자 : 조선 - 2명
일본 - ?

1차 출전에서 세계 해전 사상 초유의 기록을 세운 이순신의 함대는 모든 병사들이 자신감을 얻는 또 다른 성과를 거두며 개선하여 전라좌수영으로 돌아왔다. 이순신이 돌아오자 전라좌수영에는 놀라운 소식이 와 있었다. 선조가 백성들을 속여 안심시키고는 혼자 야밤에 도주했고 이에 분개한 백성들이 경복궁과 창경궁 등을 불태웠으며, 길가의 백성들도 도망가는 선조에게 돌을 던지며 저주했다는 것이다.

* 제 2차 출전
5월 27일 원균은 왜 함대 10여 척이 사천포와 곤영까지 쳐들어와서 그의 잔존 함대 3척을 이끌고 경상도와 전라도의 경계인 노량까지 도망쳐 왔다는 공문을 이순신에게 보냈다. 사천포는 전라좌수영에서 불과 50Km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이순신은 이억기 전라우수사에게 지원하라 요청하고, 자신은 먼저 23척의 전선만을 거느리고 출전하였다. 이 때 유진장에게 윤사공을 임명하고, 조방장 정걸에게 후방의 지휘를 맡겼으며, 그 자신은 우후(虞候:부사령관) 이몽구를 데리고 출전하였다.

5월 29일 제 2차 출전은 여수에서 출발하여 사천으로 향했다. 하동을 지나자 숨어있던 원균이 함선 3척을 끌고 합류하였고 함대는 노량을 거쳐 사천으로 계속 항진하였다. 사천에 당도하니 사천 포구에는 12척의 대형함이 정박하고 있었다. 이순신은 밀물이 될 때까지 기다려 적선을 완전히 격멸시켜 버리고 왜적 2600명을 도살하였다.

사천의 함대를 격멸하고 6월 2일 오전 10시경, 찾고 있던 왜적의 대장선이 당포에 있음을 발견하고 포구 입구를 막고 전투태세를 취하였다. 이에 왜적들도 정예함 아타카 함을 앞세우고 공격태세를 취하였다. 이때의 함대는 가메이 고레노리 함대로서 이순신의 함대를 향해 쳐나오고 있어 곧바로 본격적인 해전이 시작되었다.

이순신은 학익진의 깃발을 올리고 거북선을 앞세워 진격해 들어갔다. 돌격 대장 이언량은 거북선을 이끌고 맹렬히 돌격해 적의 기함 아타카를 노렸다. 거북선은 기함의 밑을 치고 들어가 거북 머리의 현자포로 적장 고레노리를 향해 발사했고, 정확한 현자포는 고레노리가 서있던 층루를 무너뜨렸다. 고레노리는 아래층으로 굴러 떨어졌고 부사령과 이몽구가 적선에 뛰어들어 고레노리의 목을 베었다. 이때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서 고레노리가 받은 임명장이 적힌 금부채를 빼앗아 왔다.

이후의 전투는 기함을 잃고 허둥대는 왜함대를 이순신의 함대가 학익진과 정자 타법을 이용해 철저하게 격파한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이순신 함대는 기함을 포함한 적선 21척을 격파하고 2820명을 도살하였다.6월 4일 이억기의 전라우수영 함대가 도착해 52척의 연합함대를 구성하고 진해쪽으로 항진을 계속하였다. 6월 5일 도망가는 적을 추격하여 적함 6척을 격침시켰고, 당항포에 도달해서는 기함을 비롯하여 26척의 전함을 격침하고, 적장 미치유키를 포함하여 2700명을 도살하였다.

이순신 함대는 당항포 해전 후 율포에서도 3척의 적함을 격침하고 3척을 나포하는 전과를 올렸는데 이 제 2차 출전의 전과는 다음과 같다.

적함 69척 격침
적함 3척 나포
적병 10120명 도살(적장 2명 포함)
아군 피해 : 전함 손실 없음. 전사 11명, 부상 47명(이순신도 어깨에 가벼운 총상을 입었다.)

이 같은 엄청난 전과 차이 외에 이순신도 어깨에 총상을 입은 바가 있다.


* 전황(戰況)

선조가 떠나버린 한양에는 이미 왜군의 조선원정 총사령부가 설치되어 있었다. 조선 원정군의 원수는 우키다 히데이에로, 그는 15세 때 히데요시의 규슈 원정전에 참가한 이래 전쟁터에서 자라온 젊은이다. 17세에 히데요시의 양녀와 혼인을 한 후 자신도 히데요시의 양자가 되었고 이번에는 총사령관으로 전쟁에 참가한 당시 나이 20세의 젊은 장군이었다.

왜군의 조선침략 전술은 육군이 신속하게 전진하고 보급은 대량 수송이 가능한 선박을 이용해 해상과 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따라서 신속한 이동을 목표로 한 육군은 그리 많은 보급품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 누구보다 자신 있던 해군이 이순신에 의해 격파되기 시작하면서 해상로는 철저히 봉쇄당한 것이다.

이에 이데이에는 한양에 있던 몇몇의 해군 대장들을 다시 바다로 돌려보내고,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장군의 육군으로 하여금 전라도로 진격하게 하였다. 또 일본 함대를 새로 편성해 3개 함대로 나누어 제 1군은 아키자카 야스하루가 맡아 70척의 전함으로 구성하고, 연합함대 총사령관으로 구키 요시타카를 임명하고 제 2군을 맡게 하며 기함으로 니혼마루(日本丸)를 배정했다. 니혼마루는 전장 70m로 노가 120자루나 되는 일본 최대의 기함으로 히데요시가 조선으로 올 때 타기로 했던 전함이다. 또 3군은 가토 요시아키가 맡는 것으로 하였다. 연합 함대는 115척의 전함으로 구성되어 해로 확보를 위한 전략 변경을 하였다.

이로서 야스하루, 요시타카, 요시아키 등은 육전대 1만여 명을 이끌고 6월 7일 한양을 출발해 6월 14일 부산에 도착했다. 여기에서 115척의 연합함대를 재구성하고 부산 서쪽 30Km 지점의 웅포(지금의 진해)에 해군 본영을 설치했다. 제 2군의 요시타카가 니혼마루를 기함으로 삼아 42척의 전함으로 웅포에 머물렀고 제 1군의 야스하루가 초대형 전함 7척을 포함하여 70척으로 선봉에 섰다. 이와 동시에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3만의 병력으로 전주성을 격파하고 전라도 수군 본영을 공격하기 위해 전진해 왔다.

제 3차 출전
일본의 전략 변경을 간파한 이순신은 곧 이억기를 불러 3차 연합함대 구성과 함께 출전을 계획하였다.
6월 23일 일본의 제 1군인 야스하루 함대 70여척이 웅포를 발진해 견내량을 통과했다.7월 4일 이억기 함대 25척이 여수에 도착하고 7월 6일 제 3차 이순신 연합함대가 전라좌수영을 발진하였다. 도중에 원균 함대 7척이 합류하여 연합함대는 새로 건조한 거북선 1척을 더해 거북선 2척을 포함 총 56척의 규모가 되었다.

7월 7일 이순신은 적선 70여척이 견내량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고, 7월 8일 이른 아침 6척의 특공선단을 견내량에 투입했다. 이 때 왜군 정탐선 2척을 발견해 추적을 시작했다. 적 정탐선은 그들의 본진이 있는 두호리 포구로 도망을 갔고, 두호리 안에서 대기 중이던 야스하루는 즉각 요격 함대를 발진시켰다.

견내량은 통영과 거제도 사이의 남북 길이 약 3Km, 너비 약 500m의 수로이다. 이순신의 특공함대와 왜의 요격함대는 즉각 조우하였다. 곧이어 야스하루의 기함이 기동하기 시작하자 이순신의 특공함대는 슬금슬금 후퇴하기 시작했다. 이어 특공선단은 70여척의 왜 함대의 추격을 받으며 한산도 북쪽의 넓은 바다로 빠져 나왔다. 왜의 선단도 견내량을 빠져나오며 추격을 계속했다.그러나 이것은 이순신의 치밀한 함정이었다. 이순신의 함대는 곧 학익진을 펴며 야스하루의 함대를 에워쌌다. 야스하루는 함정임을 알고 후퇴하려 했으나 좁은 견내량을 통과하며 밀려드는 후속함대 때문에 후퇴를 포기하고 일전을 각오하였다. 야스하루가 총공격을 명령하자 조선의 전함들은 일제히 측면으로 배를 돌려 왜선을 가로막고는 포문을 열었다.

이 전투에 대한 일본측의 ‘협판기(脇坂記)’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일본측)는 조선의 배를 약 30리 정도 추격하였다. 조선 배들은 좁은 수로를 빠져나가 넓은 바다에 이르자, 갑자기 뱃머리를 돌려 우군(왜함대)의 배를 포위하고 들락날락거리면서 공격하였고, 그 때마다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할 수 없이 좁은 수로로 다시 후퇴하려고 하였으나, 적선(이순신 함대)들이 퇴로를 막고 커다란 불화살을 마구 쏘아 아군의 배는 화염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 때문에 야스하루의 가신(家臣) 와타나베와 와키자카를 비롯하여 높은 사람들이 많이 전사하였다. 대장인 야스하루는 노가 많은 배를 탄 덕분에 겨우 도망칠 수가 있었다. 그 역시 도망치는 도중에 조선군의 공격으로 갑옷에 화살을 맞아 위험했으나 구사일생으로 도망치는데 성공하였다.”

이 한산도 해전은 이순신의 학익진과 정(丁)자 타법의 위력을 유감없이 보여준 대해전이었다. 이순신의 함대는 해전에서 적의 주력 전함 35척 포함 총 59척을 격침하고 기함 1척과 소형 쾌속선 13척만을 놓쳤다. 또 전투에 참가한 1만여 명의 왜병 중 8980명이 도살되었고, 400여 명이 한산도로 도망쳤다가 210명이 잡혀 죽고 190명만이 탈출하였다.

7월 9일 역풍이 불어 외즐포에서 하루를 쉬고, 7월 10일 새벽 이순신은 왜군의 본영인 안골포를 소탕하기 위해 출발하였다. 오전 7시경 약 21Km 떨어진 안골포에 도착해 입구를 철저히 봉쇄했다. 안골포에는 일본 해군 총사령관 구키 요시타카와 가토 요시아키의 연합 함대가 정박해 있었다. 일본 최대의 거함인 니혼마루를 비롯하여 오타루마루, 나미키리마루, 야마시라즈마루 등 대형의 전함들이 즐비한 이 연합함대는 전날의 야스하루 함대의 괴멸 소식에 미리부터 겁을 먹고 안골포에 숨어 있는 중이었다.

안골포는 지형이 얕고 좁으며, 썰물 때는 바닥이 노출되어 크기가 큰 판옥선은 마음대로 항내로 진입할 수가 없었다. 이순신은 갖은 방법으로 유인을 하려 했으나, 왜군은 야스하루 함대의 전멸을 경험한 터라 좀처럼 싸움에 응하려 들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이순신은 밀물 때를 기다려 아주 좁은 공간에서 전투를 벌이고자 하였다. 이순신은 제장들에게 명하여 전함들을 줄지어 투입하되 가장 가까이 접근한 전함이 천.지.현자 총통 및 각종 대포들을 발사하고, 포탄이 떨어지면 즉시 빠져나와 다음 배가 공격하도록 하였다.

따라서 자연히 전투는 길어지게 되었고, 또 적의 기함 니혼마루를 지키려는 다른 왜함들의 결사적인 저항으로 좀처럼 가까이 접근할 수도 없었다. 이리하여 오전 7시부터 시작된 싸움은 온종일 계속되어 저녁 8시경이 되어서야 대부분의 왜함들을 격침하거나 불태울 수 있었다.

이순신은 적의 기함 니혼마루도 항해 불가능한 상태라고 판단하고 일단 전투를 끝낸 후 항구의입구를 봉쇄한 채 밤을 지새웠다. 다음날 아침 잔적을 소탕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온종일 계속된 전투로 피곤에 지친 몸을 견디지 못하고 파수병들이 깜빡 잠든 틈을 타고 니혼마루가 몰래 도망치는데 성공하였다. 11일 새벽 이순신의 함대는 다시 왜적 소탕전에 나서려 하였다. 그러나 이미 잔적들은 모두 도망쳐 버린 뒤였다. 이순신이 즉시 수색조를 편성하여 양산강, 김해강 일대를 샅샅이 뒤지게 하였으나 이미 왜적들은 모두 부산 쪽으로 도망간 후였다. 이로서 남해의 해운로를 확보하려던 왜군의 작전은 완전히 실패하였고, 북쪽으로 진출했던 왜병들은 군수품 부족과 다가오는 겨울 추위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이순신은 승전 후 전 연합 함대를 모아놓고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며 일제히 함포를 발사하게 하여 함대의 엄청난 위력을 과시하였다. 이를 지켜본 왜병들은 이제 그들이 무사히 귀국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까지 해야만 하였다. 대단히 효과적인 함대 시위였던 것이다.

제 4차 출전
7월 13일 제 3차 출전에서 귀영한 함대는 즉시 제 4차 출전을 위해 폭약 등의 군수품 조달에 돌입하였다. 전라 우수사 이억기와는 뜻이 잘 맞아 앞으로의 전망 등에 대해 많은 의논을 하였다. 이 때 선조는 왜적이 평양으로 진군하자 또 다시 도망하여 의주까지 가 있으면서 여차하면 명나라로 넘어가려 하고 있었다.이에 이순신은 왜선의 본진인 부산 공략을 이억기와 의논하였다. 이억기는 흔쾌히 동의하고 원균을 비롯한 다른 병사들에게는 일단 비밀로 하고 추진할 것을 제안했다. 단 80척의 함선으로 500척이 넘는 적을 상대하겠다는 죽음을 불사한 결의였던 것이다. 이억기는 바로 전라우수영으로 돌아가 출동 준비를 마치고 8월 1일까지 좌수영으로 돌아오겠다고 약조하면서 우수영에 대한 지휘권도 이순신에게 맡기고 명령에 따를 것임을 다짐했다.

이억기의 함대는 8월 1일 좌수영에 도착해 연합함대를 구성하였다. 이억기의 전함 40척과 협선 52척이 이순신의 전함 34척과 협선 40척과 연합하여 전함 74척과 협선 92척의 전란이후 최대의 연합함대를 편성한 것이다. 이순신은 연합함대를 지휘하여 23일간 합동 훈련을 실시하였다. 이는 부산 침투를 염두에 둔 훈련이었지만 병사들은 그 의미를 몰랐다.

8월 24일 오후 4시, 드디어 연합 함대는 여수에서 출항하였다. 관음포에서 1박을 한 후 노량을 통과하여 8월 25일 원균의 함대 7척과 합류하였다. 다시 당포에서 1박한 후 8월 26일 밤에 견내량을 통과하였다. 8월 28일에는 낙동강 일대를 수색하고 8월 29일 장림포에서 적선 6척을 격침했다. 9월 1일 새벽 2시 장항포를 출항한 함대는 오전 8시에 적선 5척을 격침했다.

이어 오전 9시에는 적선 8척을 다대포에서 격침하고, 오전 10시에는 적선 9척을 서평포에서 격침했다. 이어 오후 2시에 적의 척후선 2척을 송도 앞에서 격침하고 이어 3시 30분경 요격선 4척을 초량목에서 격침하는 등 연전연승을 계속하며 부산진으로 진출하였다. 9월 1일 오후 3시 30분경 초량목을 통과한 이순신의 연합함대는 멀리 부산진에 무려 470척의 일본 함대가 밀집하여 있음을 발견하였다.

조선에 침입한 모든 일본 함선이 집결해 있었던 것이다. 이순신의 함대는 80여 척이었으므로 무려 6배에 달하는 것으로 6대 1의 싸움이라면 달걀로 바위를 치는 격이라 해도 무리가 없었다. 만약 이대로 도망을 친다면 사기가 오른 왜선이 맹렬히 추격해올 것이므로 이순신의 함대는 그대로 돌진해 들어갔다.

이에 왜선들은 공포의 이순신 함대의 돌격에 겁에 질려 노려보기만 할 뿐 감히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이순신이 돌격해 들어가자 이억기의 함대로 뒤를 따랐고, 원균도 엉거주춤하며 뒤를 따르고 있었다.

부산진의 왜선 470척 중에는 이미 함대를 이순신에게 잃은 와키자카 야스하루, 가토 요시아키, 구키 요시타카 등도 섞여 있었다. 이미 이순신의 신화는 왜군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어 사기는 땅에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왜선들을 에워싸고 있는 지상에 축성된 왜성과 포대 진지였다. 조선의 육군에서 탈취한 것으로 보이는 조선의 대포로 무장한 포대 진지는 이순신의 함대가 사정권에 들어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오후 4시경 이순신의 함대가 포대 진지의 사정권에 들어가자 일제히 사격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그 포수는 바로 왜병들에게 포로가 된 조선인들이었다. 아직 조선식 대포를 다룰 줄 몰랐던 왜병들의 입장에서는 유일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여기저기 포탄이 떨어지기만 했지 좀처럼 우리 함대를 명중시키지는 못했다. 아마도 조선인 포수들이 고의로 조준을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다분히 있었다.그러나 이를 눈치챈 왜병들이 조선인 포수들을 잔혹하게 다루기 시작했다. 이어 육상의 포대에서 모과 열매만한 수마석괴(水磨石塊:돌을 둥글게 깎아 만든 포탄)들이 무수히 날아와 함선에 명중해 희생자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조선의 대포에 의해 조선인이 희생당하고 있는 것이다.이순신은 “물러서지 말고 돌진하라! 지상포를 두려워 말라! 눈앞의 적선을 격멸하는데 정신을 집중하라! 우리가 적선에 바짝 접근하면 적들도 포를 쏠 수 없게 된다!”고 외치며 진격을 독려하였다.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적진 속으로 뛰어든 이순신과 그의 24척의 특공함대는 결사적으로 포를 발사하며 적선들을 파괴해 갔다. 7만 명의 왜병들은 그들의 조총 사정거리 밖에서 벌어지고 있는 해전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한편, 이억기의 함대도 곧 이 결사전에 뛰어들어 미친 듯이 적선을 향해 포를 발사하였다.

오후 4시부터 시작된 결사전은 약 3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오후 7시경, 부산 앞바다는 온통 불타는 왜선으로 뒤덮여 지척을 분간할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모든 기동함대의 대포들은 연속된 포격으로 인한 포열(砲熱)로 인해 더 이상의 사격이 불가능하였고, 포탄도 거의 다 떨어져 그야말로 유감없는 일전을 벌이고 퇴각하게 되었다.

연합함대의 기함인 이순신의 중군선으로부터 주목을 요하는 나팔이 울리고, 공격 중지와 퇴각을 명하는 깃발이 올랐다. 미친 듯이 울려대던 포성이 일시에 멈추고, 연합함대는 질서 정연하게 전장을 빠져 나갔다.불과 3시간에 걸친 이 결사 해전으로 일본은 군함 100여척과 적어도 3800명의 수군을 잃었다. 그러나 이순신의 함대도 녹도만호 정운을 비롯한 6명의 전사자를 내었고, 부상자도 25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다행히 전함은 단 한 척도 잃지 않았다.

이로써 조선 해군은 이순신의 눈부신 활약에 힘입어 남해안의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임진년 5월 4일, 제 1차 출전 이래 총 4차에 걸쳐 17회의 크고 작은 해전을 전개하여 적선의 격침, 나포가 207척이었고 수리 불가능할 정도로 대파한 적선은 152척이었다. 또 왜병 33,780명을 격살하였다. 이에 비해 조선 해군은 단 한 척의 전선 손실도 없었고, 인명 손실은 전상, 전사자를 모두 합하여 243명에 그쳤다.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세계의 어떤 전쟁에서도 특히 해전에서는 이런 기록이 없었다. 적선 격침 및 대파 359대 0, 사상자 33,780 대 243. 아마도 인류의 역사가 계속되는 한 조선 해군의 대제독 이순신의 이 불멸의 기록은 세계 해전사에 영원히 신화로 남을 것이다.

**전황(戰況)
이순신 함대의 빛나는 승리는 상대적으로 일본군의 수륙 연합 작전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였다. 4월 14일 새벽에 부산에 상륙 후 불과 20일 만인 5월 3일, 파죽지세로 서울을 점령한 왜군은 서울 함락 3일 전에 도망친 조선 왕을 쫓지 않고 무려 16일 동안이나 서울에 머무르며 후발대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선의 수군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던 일본군은 오히려 육군이 고전할 것이라고 판단하여 모든 지원을 육군에 집중시켰고, 서울 점령 때쯤이면 해군이 보급품을 싣고 수로를 이용하여 편안하게 한강까지 도달할 것이므로 한강에서 재보급을 받고 평양 공격에 나설 계획이었다.

이 작전은 다음의 보급 지점을 평양으로, 3차 보급 지점을 신의주로 하여 각각 대동강과 압록강을 이용한 보급으로 설정하여 육군의 돌격적인 진군을 전제한 것이었다. 이 작전에 따라 육군은 속전속결을 위해 가벼운 장비만으로 서울 점령에 온 힘을 기울였다. 따라서 고니시 군이 서울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보급품이 바닥난 상태에 있었다. 고니시는 재보급을 받기 위해 해군 수송 선단을 서울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 해군의 최강이라 예상하던 경상 우수군을 일거에 격파한 일본 보급 선단과 호위 함대들은 느긋하게 한려수도를 돌아 한강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이때 나타난 이순신의 함대에 5월 7일 옥포에서 일격을 당해 4천의 일본군과 2천 톤 이상의 보급품이 수장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 놀라운 소식은 일주일 후인 5월 15일 서울에 도착해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에게도 전달되었다.

예상치 못한 보급 선단의 괴멸로 더 이상 기다리는 것이 소용없어진 고니시는 할 수 없이 서울을 출발하여 평양으로 진격해 갔다. 평양성을 깨뜨리려면 최소한 한 달은 걸릴 것으로 예상한 고니시는 그 기간이면 초전의 실패를 극복하고 일본 해군이 조선 해군을 격멸하고 대동강에 나타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 조선의 왕과 신하들이 모두 성을 버리고 도망쳐 평양성엔 무혈입성하는 행운을 얻었다. 행운은 그 뿐만이 아니었다. 조선군은 평양성을 버리면서 무려 10만석이 넘는 군량미를 고스란히 남겨놓고 가 일본군을 궁지에서 구해준 것이다. 이로서 식량 문제는 해결되었고, 조선의 왕은 불과 3일 거리인 의주에 있다는 정보도 이미 입수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탄약 부족이었다. 만약 그들의 속사정이 조선군에게 알려지면 그들은 패할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모두 애타는 마음으로 보급 선단의 도착만을 기다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고니시가 그렇게 기다리던 72척의 일본 대선단이 또 다시 이순신에게 걸려 남해안도 통과하지 못하고 당포 등지에서 모조리 괴멸되고 만 것이다. 이로서 고니시는 평양에서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고 불과 3일 거리의 조선 왕도 추격할 수 없었다.

하루하루를 불안해하며 대동강만 쳐다보던 고니시에게 더욱 암울한 소식이 전해졌다. 조선 해군 제독 이순신을 잡기 위해 무려 6만의 병력과 함대가 투입되었는데 이들이 불과 이틀만에 한산도, 안골포 해전 등에서 모두 전멸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함경도 방면으로 진격한 가토 기요마사 군은 말 그대로 파죽지세로 돌진에 돌진을 거듭하고 있었다. 전라 좌수군인 이순신 함대에게 서해 보급로가 봉쇄당한데 비해, 동해쪽은 경상 좌.우 수군이 모두 초전에 무너져 무방비 상태였던 까닭에 보급에 문제가 없었던 것이다. 가토 군은 7월에 벌써 회령까지 진격하여 그 곳에 도망쳐 와 있던 조선의 두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을 잡는 쾌거를 이루었다. 순조로운 보급이 작전의 승패를 가르는 핵심이었음을 극명하게 보여준 것이다.

임진년이 지나가고 어느덧 1593년 새해가 밝았다. 그러나 일본의 평양 방면 사령관인 고니시 유키나가의 심정은 실로 참담하기만 했다. 그 동안 조선군이 남기고 간 군량미로 그의 군대가 겨우 연명은 해 왔으나 이제는 그나마도 바닥이 나 버렸고, 총탄과 화약도 겨우 비상용만 남아 있었다. 이런 때 만약 조선의 의병들이 싸움이라도 걸어오게 되면 그들의 속사정이 금방 들통 나 버리고 말 것이다. 유키나가에게는 마치 바늘방석과 같은 하루하루였던 것이다.

일본의 따뜻한 날씨에만 익숙해 있던 일본 병사들은 평안도의 매서운 추위에 몹시 시달려야 했다. 기다리는 보급 선단은 부산진 깊숙이 숨어 있다가 이순신이라는 괴물 함대에 의해 쑥밭이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일본으로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출항 기지인 부산진이 이 지경이 되었으니 이제 일본으로 영원히 못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병사들에게 널리 퍼져 있었다. 게다가 부상자들은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해 상처가 곪아 썩어 들어가고, 여름 복장을 한 채 추위에 떨어야 했으며, 식량마저 떨어져 그야말로 생지옥이 따로 없었다.

아무런 대안을 찾을 수 없었고 한성의 사령부도 속수무책으로 모든 것을 현지 사령관의 재량에 맡긴 상태였다. 따라서 지금이라도 한성으로 후퇴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으나 그것만은 절대 용납되지 않고 있었다. 만약 후퇴라도 했다가는 후일 모든 책임을 뒤집어 쓸 위험이 있어서 좀처럼 결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철군의 명분을 찾고 있던 유키나가가 평양성의 왜군을 점검하니 겨우 8천 명뿐이었다. 이때 김명원, 이일, 이원익 등의 장수들이 정규군 8천 명과 의병 3천 등 총 11,000명으로 평양성 탈환 작전을 개시하였다. 또 조선의 요청을 받은 명 나라의 군대 5만이 이여송을 장군으로 하여 도착해 있었다.

1월 7일 조.명 연합군은 평양성의 칠성문. 보통문. 함구문 등으로 총공격을 감행하였다. 유키나가는 이를 철군의 명분으로 삼아 전투다운 전투 한번 못하고 밤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밤이 되자 유키나가는 은밀히 포위되지 않은 대동문을 통하여 평양성 철수 작전을 지휘하여 빠져나갔다. 부상자와 병자는 그대로 내버려 둔 채 힘이 남아 있는 자들만 대동문을 통해 얼어붙은 대동강을 건너 남쪽으로 달아났다. 유키나가의 명령은 비참한 것이었고 그 자신은 울고 있었다.

* 따라서 명군의 참전으로 왜군이 철수했다는 것은 엄청난 과장인 것이다. 당시의 명군은 거지 군대로서 자신들의 식량마저 조선군에게 얻어먹으며 전투를 했으니 이게 어디 동맹국을 지원하러 온 군대인가? 또 그들의 전투력이라는 것도 도망가던 왜군이 벽제에 이르러 반격해 오자 혼비백산해 개성까지 도망쳐 버린 오합지졸이었던 것이다. 명군의 역할을 과장한 것은 그 동안 군 작전에 무지한 학자들이 사대사상에 젖어 명국의 공을 과대평가했던 것이다.

이때 평양 작전에 종군했던 왜병 요시노 진고자에몬은 후에 그의 일기를 통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이 날 밤은 북풍이 몹시 불었다. 추위는 살을 에는 듯하였고, 인간의 지각을 모두 앗아가는 듯하였다. 동상에 걸린 병사들은 지팡이 대신 활을 잡지도 못할 정도였고, 막대기가 다 된 다리를 그저 몽유병자처럼 질질 끌고 갈 뿐이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동사(凍死)나 아사(餓死)라는 죽음만이 길가에서 커다란 아가리를 벌리고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월 21일, 패장 유키나가는 간신히 한성에 도착하였다. 철군 도중 1400명이 죽고, 살아남은 자는 6600명에 불과하였다. 그는 차마 한성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성 밖의 용산(龍山)에 진을 쳤다. 그러나 유키나가의 고민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한성까지만 오면 식량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사정은 한성 사령부도 마찬가지여서 성내의 쥐를 잡아먹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순신의 해상 봉쇄는 이렇게 왜군들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던 것이다.

이순신 제독의 해상 봉쇄로 보급선이 끊긴 까닭에 이미 다른 경로로 북상해 있던 왜군들은 모두 서울로 집결해야만 하였다. 물론 고니시 유키나가를 비롯하여 가토 기요마사 부대도 이미 서울에 집결해 있었다. 이리하여 서울에만 무려 10만이 넘는 왜병들이 들끓어 가뜩이나 부족한 식량난을 더욱 부채질하였다. 할 수 없이 사령관 우키다 히데이에와 17명의 왜장들은 연서를 통해 히데요시에게 그들의 극심한 식량난을 알리고 더 이상 전투 행위가 불가능하니 최소한 부산 지구까지 만이라도 철수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하였다. 별다른 묘책이 있을 리 없었던 히데요시도 결국 철병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4월 18일 서울을 점령했던 왜병들은 결국 스스로 서울을 떠나 후퇴를 개시하였다. 이미 기진맥진한 왜병들은 부산까지의 긴 행군 도중 그들을 사냥하려는 조선 의병들의 습격을 염려하여 조선과 동맹 관계에 있던 명군에게 매달려 회군시 그들의 안전을 미리 보장받고 있었다. 또 함경도까지 쫓아가서 잡은 조선의 두 왕자를 인질로 하여 조선군의 추격을 막았다. 이 모든 사태가 다 이순신 제독의 남해안 봉쇄로 인한 결과인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 삼도수군통제사

남해안 봉쇄를 통해 일본 상륙군의 보급망을 완전히 차단하여 그들을 굶주림 속에 몰아넣고, 급기야는 그들이 그렇게도 점령을 소원했던 서울마저도 스스로 포기하고 떠나게 만든 이순신의 활약은 실로 영웅적인 것이었다. 저 혼자만 살겠다고 도망쳐 버린 비겁한 왕 이연의 눈에도 이순신은 확실히 구국의 영웅이었다. 이제 이순신을 빼놓고는 조선 수군을 생각할 수 없게 되자 이순신은 특명을 받아 조선 3도 수군통제사가 되었다. 3도 수군통제사의 본영으로는 한산도가 선정되었고, 경상 좌.우 수군, 전라 좌.우 수군, 충청 수군을 총망라하는 자리였다.

대제독 이순신은 즉각 군함의 증강 계획에 착수하였다. 전투함 250척을 보유하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만약 그의 계획이 성공리에 달성된다면, 비로소 부산과 대마도 간의 해상로마저 완전 봉쇄하여 조선에 이미 상륙해 있는 왜병들을 독 안에 든 쥐로 만든 뒤 일망타진할 수가 있게 될 것이다. 250척의 군함에 따르는 각종 군기와 식량 확보 및 신병 모집 등 모두를 통제사 스스로가 해결해야만 하였다. 당시의 이연 정부는 이순신의 수군을 도와주기는커녕 군량미로 지어놓은 농산물을 공출해 갈 정도로 부패하였고, 벼슬만 올려놓고는 엄청난 책임과 의무만 지우고 있었다.

한편 부산으로 철수한 왜군들은 이순신이 있는 한 남해안을 통과한다는 것은 꿈에 지나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육군의 작전도 실행에 옮길 수 없었다. 그런데 그런 이순신이 3도 수군통제사가 되었으니 더 이상 조선 정복은 생각할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부산에 집결해 있던 왜군들은 서서히 본국으로 철수해 갔고, 그 자리엔 정치꾼들이 들어서서 쓸데없는 말장난으로 세월만 낚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정치꾼들의 작태마저도 이순신에게는 도움이 되고 있었다. 우선 수적으로 절대 열세에 있는 조선 해군을 다시 증강시킬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얻은 것이다.

전쟁 발발 4년째로 접어든 1597년 1월 초, 왜국의 대추장 히데요시는 더 이상 정치꾼들의 말장난에 휘말리기를 거부하고, 실패했던 조선 정벌을 기어코 성공시키기 위해, 제 2차 조.일 전쟁을 일으켰다. 이번에도 고니시 유키나가를 선봉으로 하여 14만 7500명이 투입되었다. 지난 1차 때에는 조선의 군함이 거함이어서 해전에서 이길 수 없었다는 왜장들의 변명을 받아들여, 이번에는 모든 함대를 조선 군함보다 훨씬 크고 튼튼하게 만들어 우선 해군부터 공략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일단 철병했던 고니시 유키나가가 재차 침입해 오고 무려 15만의 왜병들이 새로 투입되자, 제 2차 대전이 발발했음을 감지한 이순신 제독은 즉각 일본군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면서 새로운 작전을 구상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런데 1월 27일, 돌연 도원수(조선군 총사령관) 권율로부터 왕명이 전달되어 왔다.

그런데 그 명령이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1월 15일 적장 가토 기요마사가 바다로 쳐들어올 것이니 적장을 바다에서 잡으라는 것이다. 이 정보는 적장 유키나가가 그의 부장 요시라를 통해 권율에게 전해온 것을 조정에 보고해 명령이 하달되었다는 것이다.

이순신은 이 명령에 대해 첫 째로 정보의 제공자가 적장이므로 신뢰할 수 없고 적의 책략일 수 있다는 것과 둘 째, 그 정보가 사실이라 하더라도 적장 하나를 잡기 위해 조선 수군을 움직일 수는 없으며, 나라의 모든 국력을 기울여야 하는 총력전에서 적장 하나를 잡는 것이 큰 의미가 없다고 주장하며 거부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순신 제독의 선진적인 작전 구상이나 전쟁관을 당시의 우둔한 사람들은 잘 이해하지 못했다. 이순신의 뜻을 전해들은 이연 왕은 자신의 명을 어겼으므로 ‘왕을 업신여긴 죄’, 그리고 출동을 거부했으므로 ‘적을 놓아 주어 이적 행위를 한 죄’를 씌워 1월 27일, 이순신을 전격 해임하고 서울로 압송하였다. 물론 이 사건의 배경에는 이순신을 질투한 원균 이하 그의 추종배들의 사주가 있었다.

구국의 영웅을 어리석은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해서 해임하고 옥사에 가둔 선조는 후임 통제사로 원균을 임명하였다. 원균은 1597년 2월 6일 한산도에 부임하였다. 그때, 전임의 이순신으로부터 인수받은 품목은 전함 200척, 군량미 9914석, 화약 4천 근, 대포 300문 등이었다.


원균은 전임 이순신 제독의 참모들을 무자비하게 파면 또는 강등시키고, 자신의 측근들을 주요 요직에 앉혔다. 군의 사기는 급격히 떨어졌고, 원균의 압제에 견디지 못한 많은 수군들이 군복을 벗어 던지고 탈영하기에 이르렀다. 또 15만의 왜군과 대치하고 비상 전시 상황을 망각한 듯, 원균은 매일 술과 계집을 작전 본부로 불러들였다. 자연히 군의 기강은 엉망이 되었다. 이런 원균의 작태는 그를 철저히 옹호하며 지원했던 왕 이연을 비롯한 조정의 대신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 동안 천재적인 이순신의 용병술에 힘입어 연전연승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조정 대신들은 막연히 조선 해군이 일본 해군을 일방적으로 물리칠 수 있으리라 과신하고 있었다.

그러한 분위기를 조장한 것은 바로 원균 자신이었다. 그는 수군의 병권을 쥐게 되면 일거에 적의 임시 소굴인 부산으로 쳐들어가 왜군을 일망타진하겠다고 호언장담하였고, 왕 이연을 비롯한 일부 대신들은 원균의 이런 어린애 같은 헛소리를 그대로 믿었던 것이다. 따라서 적이 흘려주는 정보를 그대로 믿고, 바다에 나가 적장을 잡아오라는 유치한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그런데 원균은 일단 그의 소원대로 삼군 통제사에 임명되자, 적을 소탕하러 출동하기는커녕 한산도 본영에 처박혀 태평성세라도 맞은 듯 매일같이 질탕하게 놀면서 주색잡기에만 정신을 팔고 있었다.

**원균의 출전

왜병들이 매일같이 부산과 대마도를 분주히 오가며 병참 수송을 하여 조선 상륙군을 증강시키고 있었으므로, 도원수 권율은 원균에게 즉시 출동하여 왜군의 수송로를 바다에서 차단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원균은 갖은 핑계를 대면서 결코 출전을 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 그만큼 적은 증강되어 갈 뿐이었다.

도원수의 명령이 무시되자 권율은 이 사실을 선조에게 보고하였고, 이에 따라 왕은 선전관 김식(金軾)을 파견하였다. 7월 1일, 마침내 수군 사령관 원균은 도원수 권율 앞으로 소환되었고, 이 자리에서 왕의 선전관 김식은 출전하라는 어명을 전했다.

7월 5일, 마침내 원균은 출전을 하였다. 군함과 협선을 합쳐서 무려 268척이나 되는 대함대였다. 오전 내내 준비를 마치고 정오가 되어서야 비로소 한산도의 두을포를 출항하였고, 오후 2시경에 3도 수군의 최대 요충지인 견내량을 통과하였다. 대낮에 조선 수군의 대함대가 움직이자 이를 숨어서 감시하던 왜의 척후병들은 놀라 상부에 보고하였다.

7월 5일 저녁 7시, 조선의 함대는 철천도의 외즐포에 도착하여 밤을 지샜다. 다음날 정오에 외즐포를 출발하였고, 2시쯤 영등포를 통과하여 옥포로 향하였다. 한편, 조선의 대함대가 출동했다는 보고를 받고 급히 달려온 일본 해군의 참모들은 멀리 안골포 남단에 있는 육망산(陸望山:해발 187m)에 올라가 조선의 기동 함대가 서서히 옥포로 향하고 있는 모습을 확인하였다.

이들은 이전의 이순신이 쥐도 새로 모르게 이동하던 것에 비해, 대낮에 당당히 함대가 움직이는 것에 의아해 하면서도 부산을 공략하려 하는 것을 간파하였다. 따라서 안골포. 웅포. 가덕. 김해. 죽도 등지에 분산된 함선들을 모두 부산으로 집결시키도록 하고 결전을 준비하였다. 그 동안 이순신의 조선 함대 공포증에 시달려 온 일본 수군으로서는 원균의 비상식적인 작전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만반의 대비를 하기로 한 것이다.

7월 7일 새벽 4시, 원균의 삼도 수군 연합 함대는 옥포를 떠나 부산으로 향하였고, 약 3시간 후에는 가덕도 남방을 통과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함대의 움직임은 봉수대 및 응봉(해발 358m)과 연대봉(해발 459m)에 설치되어 있는 왜병의 감시 초소에 의해 낱낱이 포착되고 있었다. 조선 해군 함대의 가덕도 남방 통과를 알리는 봉화가 하늘 높이 올랐고, 이를 발견한 부산의 왜장들은 무려 1천여 선의 대함대를 부산 방어를 위하여 절영도(영도)의 후면에 대기시켜 놓았다.

원균이 이끄는 조선 함대가 절영도 앞바다에 도착한 것은 이미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한 저녁 7시경이었다. 이때의 상황을 유성룡의 기록으로 살펴보자.
“균이 절영도에 이르자 바람이 불고 파도가 일었으며, 날은 이미 저물었는데 정박할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돌연 왜선들이 출현하자 원균은 곧 공격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하루 종일 노를 저어 피곤에 지쳐있어 앞으로 전진할 수가 없었다. 왜선은 우리가 피곤해지도록 유인했으며, 우리 함대는 통제를 잃고 사방으로 흩어져 버렸다. 밤이 깊어지자 바람이 더욱 거세어졌고, 우리 배는 표류하여 서로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게 되었다.”

왜선과는 교전도 못해 본 채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조선 함대는 제각기 그 곳을 빠져나와 본영이 있는 한산도를 향하여 막연하게 달아났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단 한 척의 왜선도 조선 함대를 추격해 오지 않았다. 이순신 함대의 유인 작전에 걸려 전멸당한 경험이 있는 왜장들은 신임 제독 원균을 만나 또 무슨 예상 못한 함정이라도 있지 않을까 지극히 신중을 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항해에 무지했던 한심한 원균은 날씨 변화와 사람의 한계를 무시한 멍청한 항해를 강행함으로써, 왜적들과는 싸워 보지도 못하고 극도로 지쳐서 마치 패전한 것처럼 무려 20여 척의 함선을 일시에 잃고 말았던 것이다. 왜선의 추격을 예상하고 공포의 탈출극을 연출한 원균 함대가 겨우 가덕도에 도착하자, 극도로 목이 말랐던 병사들은 저마다 앞을 다투어 상륙하여 정신없이 물을 찾았다.

그러나 가덕도에는 왜장 도진의홍이 이끄는 살마군(薩摩軍)이 있었다. 그들은 갑자기 뛰어든 비무장의 조선 수병들을 발견하고 무자비하게 도륙해 버렸다. 상륙하기 전에 정찰병 하나 파견할 줄 몰랐던 원균의 무지로 인해 무려 400여 명의 부하들이 순식간에 목숨을 잃고 만 것이다.

7월 9일 새벽 4시경, 원균이 이끄는 연합 함대는 간신히 칠천량의 외즐포에 도착하였다. 왕의 명령을 받고 부산의 일본 함대를 격멸하겠다고 떠났던 원균 함대는 왜선과는 교전 한 번 못해 본 채 무려 20척의 함선과 400여 명의 부하들만 잃고 말았다. 마치 패잔병처럼 전의를 상실한 원균에겐 한산도 본영으로 빨리 돌아가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다.

그러나 원균의 승첩 보고만을 손꼽아 기다리던 도원수 권율은 원균이 부산 문턱에서 되돌아왔다는 보고를 받고 격노하였다. 권율은 원균을 급히 불러들여 명색이 삼군 통제사인 그를 묶어놓고 곤장을 때려 그의 비겁함을 꾸짖은 다음, 다시 부산으로 진격할 것을 명령했다. 이로써 한산도 본영으로 돌아가려던 원균의 계획은 좌절되었다. 그렇다고 다시 부산으로 쳐들어갈 용기도 없어 매일 술만 퍼마시면서 자포자기에 빠졌다.

한편, 원균 함대의 부산 공격으로 일시 당황했던 왜장들은 공격이 있던 날 원균이 보여준 수상한 행동이 작전과는 무관한 원균의 무지였음을 알고 조선 수군을 전멸시킬 절호의 기회라고 전의를 불태우게 된다.
이리하여 부산을 결사 수호하려던 왜장들은 작전을 바꾸어 원균 함대를 전멸시키기 위하여 1천여 척의 대연합 함대를 조선 함대가 정박해 있는 외즐포로부터 불과 60리 거리에 있는 웅포와 안골포 등지로 총집결시켰다.

7월 15일 밤 10시, 왜군은 6척의 특공 함대를 파견하여 원균 함대의 방어 태세를 시험해 보았다. 그런데 원균은 함대가 정박해 있는 외즐포의 외항에 경비선 하나 세우지 않고 술에 곯아떨어져 있었다. 왜선들의 대담한 야습으로 원균 함대는 일대 혼란에 빠졌다. 일본 특공 함대가 돌아가자, 눈치 빠른 경상 우수사 배설은 원균 밑에 있다가는 목숨도 부지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자신의 직속 함대 12척을 이끌고 일본 특공함대를 추격하는 척하면서 외즐포를 벗어나 한산도 방면으로 도망쳐 버렸다.
불과 6척의 특공 선단 출현에 조선 수군의 본진이 허둥지둥 했다는 소식에도 왜장들은 섣불리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그 동안 이순신 함대의 유익.매복.기습 작전에 걸려 참패를 했던 경험 때문이었다.

결국 원균의 무지함에 대해 확인하고도 전 일본 해군을 비롯하여 무려 10만의 육군까지 동원하여 조선 수군 전멸전을 준비하였다. 이 작전에는 도도 다카토라, 와키자카 야스하루, 구루시마 미치후사, 가토 요시아키, 시마즈 요시히로 등과 고니시 유키나가 등까지 참전하여 무려 30여 왜장들이 연합하였다.
16일 새벽 4시경, 일본 최대의 연합 함대가 외즐포로 통하는 상.하 양쪽의 항구 입구를 겹겹이 포위한 뒤 동원할 수 있는 모든 화력을 집중하여 일시에 돌진해 들어갔다. 원균의 조선 함대는 제대로 저항 한번 못하고 붕괴되기 시작했다.

이때까지도 술기운에서 깨어나지도 못한 원균은 갑옷도 걸치지 못한 채 기함에 올라 외즐포를 탈출하기 위하여 좌충우돌하였다. 겨우 겹겹이 쳐진 왜군의 포위망을 뚫고 한산도로 달아났다. 거의 모든 조선 군함들은 불타고 있었고 기함을 따르는 배는 2, 3척에 지나지 않았다. 간신히 한산도로 통하는 견내량 입구에 도착하니 그곳에도 수백 척의 왜선들이 수로를 철통같이 봉쇄하고 있었다. 이 때, 조선의 기함을 발견한 왜선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집중 공격을 퍼부으니 기함은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여 버렸다.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된 원균은 배를 버리고 물에 뛰어들어 간신히 섬으로 기어올랐다. 그러자 이를 본 왜병들이 공을 다투며 추격하여 결국 원균은 그들에게 잡혀 참혹하게 살해되고 말았다.

원균의 기함이 전장을 이탈하여 달아나자 이억기와 최호(충청 수사) 함대도 적의 포위망을 뚫고 기함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 원균이 배를 버리자 방향을 바꿔 춘원포로 향했는데 그곳에도 왜선들이 대기하고 있어 최후의 결전을 벌이게 되었다. 결국 패전의 책임을 스스로 짊어지고 이억기는 목에 칼을 꽂아 영웅답게 자결하였다. 이로서 전설적인 이순신 함대는 원균에 의해 완전히 전멸하고 말았다.

이제 더 이상 조선 해군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기고만장한 우키다 히데이에는 7월 17일, 작전 회의를 통해 이미 북진중인 우군(右軍)을 제외하고 좌군(左軍)과 중군(中軍)의 10만 대병을 군선을 이용하여 곧장 한강으로 상륙시켜 한성을 점령하는 계획을 세웠다. 이에 따라 7월 29일, 일본의 좌군과 중군은 일제히 서해를 향하여 출발하였다.

내용출처 : [기타] 인터넷 :
http://www.damool.net/html/special/leesoonsin.htm
출처 : 이선생의 블로그
글쓴이 : 이선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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