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조영님 기자] 7월 19일. 나와 아들은 연대에서 밤 9시 25분에 출발하는 버스를 타고 상해로 향했다. 그동안 주로 산동성을 답사하였다면, 이번 답사는 산동성을 벗어나서 중국의 최대 도시일 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도시로 유명한 상해를 가는 것이니만큼 조금 긴장이 되었다.
물론 길을 잘못 들어서면 어쩌나, 내 말을 사람들이 못 알아들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은 진작에 훌훌 털어버렸다. 길을 잘못 들어섰으면 무조건 택시를 타고 지도에 있는 곳으로 가자고 하면 되고, 말귀를 못 알아듣겠으면 '미안합니다만 제가 못 알아들으니 좀 한자로 적어주세요'라고 하면 되기 때문이다. 별것 아닐 수 있지만 이것 역시 그동안 아들과 둘이서 답사하면서 체득한 여행의 노하우이다.
아들은 침대 버스를 처음 타본다고 하면서 신이 나서 혼자 키득키득 웃다가 잠이 들었다. 대형 버스 안에는 좌우와 중앙에 다섯 개씩의 침대를 배열해 놓았고 차 뒤편으로 네 개 정도의 침대가 놓여 있었다. 겨우 몸을 좌우로 뒤집을 수 있을 정도의 좁은 침대였다. 화장실은 없었다. 중국처럼 광활한 나라에서는 이런 침대차가 필요하겠구나 싶었다. 어렴풋이 잠이 들었다가 다시 경적 소리에 놀라 잠을 깨고 보니 상해에 도착했다.
빗방울이 제법 굵게 떨어져서 상점에 들러 우산을 샀다. 그리고 주인에게 '예원(豫園)'을 어떻게 가야 하는지 물어보자, 옆에 있던 할머니 한 분이 따라오라고 하면서 전철 타는 곳까지 데려다 주었다. 전철을 두 번 갈아타야 한다고 하였다. 상해의 첫인상은 친절한 할머니로 기억될 것 같다.
부모를 기쁘게 하기 위해 건축한 개인 정원
드디어 상해의 첫 번째 답사 코스인 '예원(豫園)'에 도착했다. 고색창연한 아름다운 정원을 만나기 전에 찻잔, 도자기, 골동품, 옷 가게, 음식점 등의 온갖 상품을 진열해 놓은 100여 개의 다양한 상점들을 한참 지나갔다.
30원짜리 입장표를 사들고 예원으로 들어갔다. 입구에 막 들어서자마자 커다란 바위에 누렇게 새겨진 '해상명원(海上名園)'이라는 글귀가 보였다. 강택민이 쓴 것이다. 중국의 전역에 가장 많은 자취를 남긴 사람은 단연 강택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유명한 관광지 곳곳에서 그의 필체를 볼 수 있다.
예원은 효자로 이름이 났던 반윤단(潘允端)이 그의 부모를 기쁘게 하기 위해 건축한 일종의 한 개인의 정원이었다. 예원은 명나라 가정(嘉靖) 연간인 1559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무려 18년의 세월이 흐른 1577년에 완공되었다고 한다. 물론 예원 전체가 완공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워낙 긴 세월 동안 공사를 진행하다 보니 완공될 즈음에는 반윤단의 부모님은 이미 돌아가셨고, 반윤단 자신도 예원에서 몇 년 살지 못하고 병으로 죽었다고 한다.
예원에는 삼수당(三穗堂), 대가산(大假山), 득월루(得月樓), 옥영롱(玉玲瓏), 청도각(聽濤閣), 내원(內園), 지당(池塘) 등 40여 개의 명청시대 건축물들과 볼거리들이 질서정연하게 배열되어 있다. 예원이야말로 강남 고전의 원림 가운데 으뜸이라고 하는데 다른 곳을 가보지 않아 어떠한지 비교할 수 없지만 18년간 공을 들여 건축한 반윤단의 효심과 뛰어난 안목을 느끼기에 충분하였다.
예원에 있는 다섯 마리의 용, 화를 당하지 않고 보존된 까닭?
예원하면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용벽(龍壁)이다. 당장에라도 비상할 듯한 용의 형상을 담장 위에 표현하였는데, 오늘날의 건축 미학으로 보아도 신선하고 파격적이다.
용은 고대 신화에 나오는 신이한 동물로 구름을 일으키고 비를 만들 수 있다고 한다. 용은 황제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래서 용안이니 건룡포니 하는 말이 있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일반 백성들의 정원에 용의 모양을 조각하면 지존인 황제의 권좌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되어 참형을 면치 못하였다.
반윤단이 기획하여 만든 예원에는 모두 다섯 마리의 용이 있다. 그런데 화를 당하지 않고 지금까지 보존될 수 있었던 원인은 무엇일까?
반윤단의 야심을 의심한 황제는 급기야 호출하기에 이른다. 이때 반윤단은 "폐하, 원래 용의 발톱은 다섯 개이온데, 신이 만든 정원의 저 동물의 발톱을 보십시오. 세 개이옵니다"라고 말하여 위기를 모면하였다고 한다.
과연 세 개의 발톱만이 있었다. 반윤단은 당대에 위기를 모면하였지만, 이후 반씨 집안이 쇠락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용을 조각했기 때문이라는 뒷이야기가 무성한 것을 보면 용은 필시 보통 사람이 가까이할 동물이 아님은 분명한 듯하다.
담벼락 위의 용의 모양은 소의 머리, 말의 얼굴, 사슴의 뿔, 잉어의 수염, 개의 이빨, 매의 발톱, 물고기의 비늘을 종합하여 만들어진 것 같아 보인다.
예원의 두 번째 특징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아름다운 정원 곳곳에 있는 기암괴석이다. 그중에서도 반윤단의 서실로 쓰였던 옥화당(玉華堂)의 앞에 우뚝 솟아 있는 석봉인 옥영롱(玉玲瓏)이 가장 특이하다.
이것은 강남 삼대 명석(名石)중의 하나라고 한다. 높이는 3.3미터이고 무게는 1000여 근이 나간다고 한다. 돌에 72개의 구멍이 숭숭 나 있는데, 밑에서 연기를 피우면 다른 구멍으로 연기가 나오고 물을 부어도 다른 구멍으로 물이 나온다고 한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옥영롱은 900여 년 전 송대에서 나온 것으로, 송나라 휘종이 천하의 기이한 수석을 수집하여 놓았다가 수도를 변경(汴京)으로 옮기다가 유실된 기암괴석 중의 하나라고 한다. 돌의 윗면은 크고 아랫면은 작은데 그 모습이 영지초와 닮았다고 하는 이도 있고 소녀가 서 있는 모습 같다고 하는 이도 있다.
내가 보기에는 이도 저도 아닌 것 같은데 아들은 '몬스터'와 닮았다고 하였다. 왜 그러냐고 하니까 "그냥 그렇게 보인다"고 할 뿐이었다. 역시 세상은 자신이 아는 만큼, 느끼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맞다. 아들의 입장에서 저 괴상한 돌을 보고 몬스터 같다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예원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
예원이 가지고 있는 세 번째의 특징적인 것은 바로 현판과 주련에 쓰인 좋은 글귀들이다. 현판과 주련은 대부분 당대의 유명한 서법가들의 글씨이고, 글귀들은 대부분 경전과 저명한 시인의 시구에서 따온 것이다.
우선, 예원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석벽을 돌면 '봉회로전(峰回路轉)'이라는 글귀가 보인다. 이것은 청대의 서법가인 과정문(過庭聞)이 쓴 것이고, 글귀는 중국 초당 때의 시인인 진자앙(陳子昻) 시의 '구불구불한 길은 청산으로 이어지고, 산봉우리 구비 돌자 석양이로구나(路轉靑山合 峰回白日曛)'에서 따온 것이다. 이곳에서 출발하여 구불구불 이어지는 길을 따라 예원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다.
또 나무로 된 건축물인데도 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아서 사람들의 발길을 멈추게 하는 삼수당(三穗堂) 안에는 '삼수당(三穗堂)', '영대경시(靈臺經始)', '성시산림(城市山林)'이라는 큰 현판을 볼 수 있다. 삼수당은 원래 '낙수당(樂壽堂)'으로 불렸다고 한다. 낙수는 오래 즐겁게 산다는 뜻이 담겼으니, 반윤단의 효심을 읽을 수 있다.
삼수는 세 개의 벼 이삭이라는 뜻으로 풍성한 수확과 길운을 뜻한다. 한(漢) 나라 때 채무(蔡茂)란 사람이 태극전(太極殿) 위에 하나의 벼에 세 개의 이삭이 나와 있는 것을 보고 뛰어올라 벼를 잡았는데, 그 후에 벼슬이 승진되었다고 한데서 나온 말이다.
'영대경시'라는 말은 시경(詩經)과 중용(中庸)에서 따온 말이다. 영대는 옛날 주나라 문왕이 만든 대(臺) 이름이다. 또 '성시산림'은 원림을 가지 않아도 산수 자연의 그윽한 아취를 느낄 수 있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우리나라 옛날 선비들도 조그마한 정원이라도 있는 곳에는 자주 이런 현판을 걸곤 하였다.
삼수당의 뒤편에는 '앙산당(仰山堂)'이 있다. '앙산'이라는 말도 시경에서 따온 말이다. 즉, '높은 산을 우러르고 큰길을 따라가네(高山仰止 景行行止)'라는 뜻으로 덕이 있는 자나 큰 스승을 사모하고 모범으로 삼아 행동하겠다는 뜻이다.
만화루를 뒤로 하고 회랑을 따라 왼쪽으로 가다보면 '점춘당(点春堂)'이 있다. '점춘'이라는 말은 소동파의 시구인 '취점춘연(翠點春姸)'에서 따온 말이다. '푸른 빛의 아름다운 봄'이라는 뜻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곳이 봄빛을 완상하기에 가장 좋은 곳이기에 붙여진 이름이 아닌가 싶다.
이곳에서 한국에서 온 단체 관광객을 많이 만났다. 대전에서 온 고등학생들이라고 하였다. 내가 고등학교 때에는 제주도에 가는 것도 대단한 여행이었는데, 지금의 학생들은 내가 고등학생이었을 때보다 훨씬 많은 문화적 혜택을 받고 자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인솔하는 가이드가 "이곳은 반윤단이 아버지의 회춘을 위해 젊은 여자를 간택하던 곳이었다"고 설명하는 것을 들었다. 원래 '춘(春)' 자에 젊음, 회생의 뜻이 담겨 있긴 하지만, 그렇다면 이곳은 봄빛을 감상하기에 적당한 곳이 아니라 젊은 여자를 간택하던 곳이라고 하니 공연이 '점춘'이라는 말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점춘당은 청(淸)나라 말기의 비밀결사대인 소도회(小刀會)의 본부로 쓰였던 곳이기도 하다. '반청복명(反淸復明)'을 주창한 이들은 결국 청나라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는데, 이곳에는 소도회와 관련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점춘당 맞은편에 있는 작은 누각은 반윤단이 친척과 친구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마련한 일종의 연극무대이다. 이곳에 1961년 곽말약이 와서 남긴 시 한 수가 쓰여 있다.
만화루(萬花樓)에는 다음과 같은 주련이 보인다.
계수나무, 난 꽃 향기 그윽타
물은 흘러가고 산은 고요하구나.
꽃 피고 버드나무 어여뻐라
날씨 화창하고 바람도 시원쿠나.
(桂馥蘭芬水流山靜 花開柳媚日朗風淸)
이렇게 예원에 있는 수많은 현판과 주련과 석벽에 새겨져 있는 글귀들에는 고상한 뜻과 아취가 있었으며 예원의 작은 연못과 괴석, 수십 종의 수목들과 조화를 이루도록 기획된 한 편의 작품이었다.
또 이곳에 온다면 그땐 꼭 겨울에 오겠다
번화한 현대 도시인 상해에서 가장 전통적인 곳으로 예원이 꼽히다 보니 이곳에는 언제나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는 것 같다. 찬찬히 꼼꼼하게 정원을 두루 살펴보려면 하루가 꼬박 걸릴 것이다.
다음에 또 이곳 예원을 오게 될 기회가 있다면 그땐 꼭 겨울에 오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미련이 남는 예원을 나왔다.
18년간에 걸쳐 완공한 대정원에서 몇 년 살지 못하고 죽은 정원 주인인 반윤단을 생각하면서 '만드는 자 따로 있고, 누리고 즐기는 자 따로 있다'는 말이 떠올랐다. 비록 자신이 만든 정원에서 충분히 누리지 못하였다고 하더라도 수백 년이 지난 지금 예원을 찾는 발길이 끊이지 않는 것만도, 반윤단의 이름을 되뇌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보상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촉촉이 내리는 빗속을 걸으며 예원상가를 구경하였다. 빨대로 빨아먹는 만두도 사 먹었다. 모양만 특이하지 별맛은 없었다. 쇼핑을 귀찮아하는 내게도 예쁘고 앙증맞은 물건들이 눈에 쏙쏙 들어왔다. 예원을 보러 왔다가 예원상가에서만 하루를 보냈다는 말이 틀리지 않을 정도로 화려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아들은 또 장난감 가게를 지나치고 못하고 카드를 사고 싶다고 하였다. 얼마냐고 하니까 30원이라고 한다. 입이 쩍 벌어졌다. 연대에서는 5원이면 살 수 있는 것이었다. 내가 어이없어하니까 계산기를 갖다 대고 얼마에 사고 싶은지 말하라고 하는데 아들을 달래어서 그냥 나왔다. 듣던 대로 예원상가의 물가가 장난이 아니었다. 답사 첫날 물건을 산다고 해도 며칠이 될지도 모르는 여행에 짐만 되기 때문에 아이쇼핑하는 것으로 만족하며 다음 코스로 이동했다.
물론 길을 잘못 들어서면 어쩌나, 내 말을 사람들이 못 알아들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은 진작에 훌훌 털어버렸다. 길을 잘못 들어섰으면 무조건 택시를 타고 지도에 있는 곳으로 가자고 하면 되고, 말귀를 못 알아듣겠으면 '미안합니다만 제가 못 알아들으니 좀 한자로 적어주세요'라고 하면 되기 때문이다. 별것 아닐 수 있지만 이것 역시 그동안 아들과 둘이서 답사하면서 체득한 여행의 노하우이다.
아들은 침대 버스를 처음 타본다고 하면서 신이 나서 혼자 키득키득 웃다가 잠이 들었다. 대형 버스 안에는 좌우와 중앙에 다섯 개씩의 침대를 배열해 놓았고 차 뒤편으로 네 개 정도의 침대가 놓여 있었다. 겨우 몸을 좌우로 뒤집을 수 있을 정도의 좁은 침대였다. 화장실은 없었다. 중국처럼 광활한 나라에서는 이런 침대차가 필요하겠구나 싶었다. 어렴풋이 잠이 들었다가 다시 경적 소리에 놀라 잠을 깨고 보니 상해에 도착했다.
빗방울이 제법 굵게 떨어져서 상점에 들러 우산을 샀다. 그리고 주인에게 '예원(豫園)'을 어떻게 가야 하는지 물어보자, 옆에 있던 할머니 한 분이 따라오라고 하면서 전철 타는 곳까지 데려다 주었다. 전철을 두 번 갈아타야 한다고 하였다. 상해의 첫인상은 친절한 할머니로 기억될 것 같다.
부모를 기쁘게 하기 위해 건축한 개인 정원
▲ 예원의 입구이다. 예원 주변의 건축물은 명청 시대의 건축양식을 본떠 만든 것이라고 한다. |
ⓒ2007 조영님 |
30원짜리 입장표를 사들고 예원으로 들어갔다. 입구에 막 들어서자마자 커다란 바위에 누렇게 새겨진 '해상명원(海上名園)'이라는 글귀가 보였다. 강택민이 쓴 것이다. 중국의 전역에 가장 많은 자취를 남긴 사람은 단연 강택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유명한 관광지 곳곳에서 그의 필체를 볼 수 있다.
예원은 효자로 이름이 났던 반윤단(潘允端)이 그의 부모를 기쁘게 하기 위해 건축한 일종의 한 개인의 정원이었다. 예원은 명나라 가정(嘉靖) 연간인 1559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무려 18년의 세월이 흐른 1577년에 완공되었다고 한다. 물론 예원 전체가 완공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워낙 긴 세월 동안 공사를 진행하다 보니 완공될 즈음에는 반윤단의 부모님은 이미 돌아가셨고, 반윤단 자신도 예원에서 몇 년 살지 못하고 병으로 죽었다고 한다.
예원에는 삼수당(三穗堂), 대가산(大假山), 득월루(得月樓), 옥영롱(玉玲瓏), 청도각(聽濤閣), 내원(內園), 지당(池塘) 등 40여 개의 명청시대 건축물들과 볼거리들이 질서정연하게 배열되어 있다. 예원이야말로 강남 고전의 원림 가운데 으뜸이라고 하는데 다른 곳을 가보지 않아 어떠한지 비교할 수 없지만 18년간 공을 들여 건축한 반윤단의 효심과 뛰어난 안목을 느끼기에 충분하였다.
예원에 있는 다섯 마리의 용, 화를 당하지 않고 보존된 까닭?
▲ 복룡(伏龍)이라 불리는 용이다. 길이가 55미터이다. 예원 안에 있는 다섯 개의 용 가운데 가장 길다. |
ⓒ2007 조영님 |
용은 고대 신화에 나오는 신이한 동물로 구름을 일으키고 비를 만들 수 있다고 한다. 용은 황제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래서 용안이니 건룡포니 하는 말이 있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일반 백성들의 정원에 용의 모양을 조각하면 지존인 황제의 권좌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되어 참형을 면치 못하였다.
반윤단이 기획하여 만든 예원에는 모두 다섯 마리의 용이 있다. 그런데 화를 당하지 않고 지금까지 보존될 수 있었던 원인은 무엇일까?
반윤단의 야심을 의심한 황제는 급기야 호출하기에 이른다. 이때 반윤단은 "폐하, 원래 용의 발톱은 다섯 개이온데, 신이 만든 정원의 저 동물의 발톱을 보십시오. 세 개이옵니다"라고 말하여 위기를 모면하였다고 한다.
과연 세 개의 발톱만이 있었다. 반윤단은 당대에 위기를 모면하였지만, 이후 반씨 집안이 쇠락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용을 조각했기 때문이라는 뒷이야기가 무성한 것을 보면 용은 필시 보통 사람이 가까이할 동물이 아님은 분명한 듯하다.
담벼락 위의 용의 모양은 소의 머리, 말의 얼굴, 사슴의 뿔, 잉어의 수염, 개의 이빨, 매의 발톱, 물고기의 비늘을 종합하여 만들어진 것 같아 보인다.
▲ 앞면에 보이는 기이한 돌이 '옥영롱'이다. 멀리서 보아도 구멍이 숭숭 나 있다. |
ⓒ2007 조영님 |
이것은 강남 삼대 명석(名石)중의 하나라고 한다. 높이는 3.3미터이고 무게는 1000여 근이 나간다고 한다. 돌에 72개의 구멍이 숭숭 나 있는데, 밑에서 연기를 피우면 다른 구멍으로 연기가 나오고 물을 부어도 다른 구멍으로 물이 나온다고 한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옥영롱은 900여 년 전 송대에서 나온 것으로, 송나라 휘종이 천하의 기이한 수석을 수집하여 놓았다가 수도를 변경(汴京)으로 옮기다가 유실된 기암괴석 중의 하나라고 한다. 돌의 윗면은 크고 아랫면은 작은데 그 모습이 영지초와 닮았다고 하는 이도 있고 소녀가 서 있는 모습 같다고 하는 이도 있다.
내가 보기에는 이도 저도 아닌 것 같은데 아들은 '몬스터'와 닮았다고 하였다. 왜 그러냐고 하니까 "그냥 그렇게 보인다"고 할 뿐이었다. 역시 세상은 자신이 아는 만큼, 느끼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맞다. 아들의 입장에서 저 괴상한 돌을 보고 몬스터 같다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예원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
예원이 가지고 있는 세 번째의 특징적인 것은 바로 현판과 주련에 쓰인 좋은 글귀들이다. 현판과 주련은 대부분 당대의 유명한 서법가들의 글씨이고, 글귀들은 대부분 경전과 저명한 시인의 시구에서 따온 것이다.
우선, 예원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석벽을 돌면 '봉회로전(峰回路轉)'이라는 글귀가 보인다. 이것은 청대의 서법가인 과정문(過庭聞)이 쓴 것이고, 글귀는 중국 초당 때의 시인인 진자앙(陳子昻) 시의 '구불구불한 길은 청산으로 이어지고, 산봉우리 구비 돌자 석양이로구나(路轉靑山合 峰回白日曛)'에서 따온 것이다. 이곳에서 출발하여 구불구불 이어지는 길을 따라 예원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다.
▲ 이곳 건축 양식의 특징은 누각 끝이 비상할 듯이 치켜 올라가 있다는 것이다. |
ⓒ2007 조영님 |
삼수는 세 개의 벼 이삭이라는 뜻으로 풍성한 수확과 길운을 뜻한다. 한(漢) 나라 때 채무(蔡茂)란 사람이 태극전(太極殿) 위에 하나의 벼에 세 개의 이삭이 나와 있는 것을 보고 뛰어올라 벼를 잡았는데, 그 후에 벼슬이 승진되었다고 한데서 나온 말이다.
'영대경시'라는 말은 시경(詩經)과 중용(中庸)에서 따온 말이다. 영대는 옛날 주나라 문왕이 만든 대(臺) 이름이다. 또 '성시산림'은 원림을 가지 않아도 산수 자연의 그윽한 아취를 느낄 수 있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우리나라 옛날 선비들도 조그마한 정원이라도 있는 곳에는 자주 이런 현판을 걸곤 하였다.
삼수당의 뒤편에는 '앙산당(仰山堂)'이 있다. '앙산'이라는 말도 시경에서 따온 말이다. 즉, '높은 산을 우러르고 큰길을 따라가네(高山仰止 景行行止)'라는 뜻으로 덕이 있는 자나 큰 스승을 사모하고 모범으로 삼아 행동하겠다는 뜻이다.
만화루를 뒤로 하고 회랑을 따라 왼쪽으로 가다보면 '점춘당(点春堂)'이 있다. '점춘'이라는 말은 소동파의 시구인 '취점춘연(翠點春姸)'에서 따온 말이다. '푸른 빛의 아름다운 봄'이라는 뜻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곳이 봄빛을 완상하기에 가장 좋은 곳이기에 붙여진 이름이 아닌가 싶다.
▲ 옥수랑(玉水廊). 물 위에 떠 있는 긴 수랑(水廊)이다. |
ⓒ2007 조영님 |
이 점춘당은 청(淸)나라 말기의 비밀결사대인 소도회(小刀會)의 본부로 쓰였던 곳이기도 하다. '반청복명(反淸復明)'을 주창한 이들은 결국 청나라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는데, 이곳에는 소도회와 관련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점춘당 맞은편에 있는 작은 누각은 반윤단이 친척과 친구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마련한 일종의 연극무대이다. 이곳에 1961년 곽말약이 와서 남긴 시 한 수가 쓰여 있다.
만화루(萬花樓)에는 다음과 같은 주련이 보인다.
계수나무, 난 꽃 향기 그윽타
물은 흘러가고 산은 고요하구나.
꽃 피고 버드나무 어여뻐라
날씨 화창하고 바람도 시원쿠나.
(桂馥蘭芬水流山靜 花開柳媚日朗風淸)
이렇게 예원에 있는 수많은 현판과 주련과 석벽에 새겨져 있는 글귀들에는 고상한 뜻과 아취가 있었으며 예원의 작은 연못과 괴석, 수십 종의 수목들과 조화를 이루도록 기획된 한 편의 작품이었다.
또 이곳에 온다면 그땐 꼭 겨울에 오겠다
▲ 예원의 주변에 즐비하게 늘어선 화려한 상점들이 발길을 유혹하고 있다. |
ⓒ2007 조영님 |
다음에 또 이곳 예원을 오게 될 기회가 있다면 그땐 꼭 겨울에 오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미련이 남는 예원을 나왔다.
18년간에 걸쳐 완공한 대정원에서 몇 년 살지 못하고 죽은 정원 주인인 반윤단을 생각하면서 '만드는 자 따로 있고, 누리고 즐기는 자 따로 있다'는 말이 떠올랐다. 비록 자신이 만든 정원에서 충분히 누리지 못하였다고 하더라도 수백 년이 지난 지금 예원을 찾는 발길이 끊이지 않는 것만도, 반윤단의 이름을 되뇌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보상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촉촉이 내리는 빗속을 걸으며 예원상가를 구경하였다. 빨대로 빨아먹는 만두도 사 먹었다. 모양만 특이하지 별맛은 없었다. 쇼핑을 귀찮아하는 내게도 예쁘고 앙증맞은 물건들이 눈에 쏙쏙 들어왔다. 예원을 보러 왔다가 예원상가에서만 하루를 보냈다는 말이 틀리지 않을 정도로 화려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아들은 또 장난감 가게를 지나치고 못하고 카드를 사고 싶다고 하였다. 얼마냐고 하니까 30원이라고 한다. 입이 쩍 벌어졌다. 연대에서는 5원이면 살 수 있는 것이었다. 내가 어이없어하니까 계산기를 갖다 대고 얼마에 사고 싶은지 말하라고 하는데 아들을 달래어서 그냥 나왔다. 듣던 대로 예원상가의 물가가 장난이 아니었다. 답사 첫날 물건을 산다고 해도 며칠이 될지도 모르는 여행에 짐만 되기 때문에 아이쇼핑하는 것으로 만족하며 다음 코스로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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