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 지만원 |
지만원이 그린 박정희 초상 한일협정과 박정희 1965년 한일협정에 의한 배상 자금은 얼마이었나? 한일회담 14년, 이승만-장면 정권에서 9년간 협상했고, 박정희 정권 5년 만에 타결을 보았다. 타결액은 무상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 민간상업차관 3억 달러, 총 8억 달러였다. 정부 부문 청구액 5억 달러는 66년부터 75년까지 10년에 걸쳐 나눠 받되, 매년 무상 3,000만달러, 유상 2,000만 달러 총 5,000만 달러 한도 내에서 양국 정부의 협의에 의해 받기로 했다. 유상 2억달러에 대해서는 산업시설과 기계류 등 공공차관의 형태로 7년 거치 13년 분할 상환하되 금리는 연 3.5%가 적용됐다. 이에 대해서는 마치 선진국들의 은행이 기업 프로젝트에 자금을 빌려준 후부터 자금 사용과정을 감시하듯이 일본 역시 빌려주는 돈을 받지 못 할까봐 사용과정을 감시했다. 박정희는 이 돈을 어디에 썼나? 76년 당시 경제기획원 발간 '청구권자금백서'에 따르면 전체 청구권 자금의 55.6%가 포항제철 건설 등 광공업 투자에 쓰였다. 유상 2억달러는 대부분 포항제철 등 기간산업과 경부고속도로 등 사회간접자본 시설 확충에 사용됐다. 사회간접자본 확충에도 전체 자금의 18%를 투입했다. 소양강 다목적댐 건설(2,161만 달러).경부고속도로 건설(689만 달러).상수도 확장(409만 달러).한강철교 복구(89만 달러).영동화력발전소 건설(178만 달러). 철도시설 개선(2,027만 달러) 등이 이때 이뤄졌다. 상대적으로 농어민에게 돌아간 자금은 많지 않았다. 농림업에 7.8%, 수산업에 5.4% 등 농림어업에 총 13.2%를 배정했다. 이 중 포항종합제철 건설에만 무상자금 3,080만 달러와 유상자금 8,868만 달러 등 총 1억1948만 달러를 몰아줬다. 전체 청구권 자금의 23.9%에 이른다. 광공업용으로 도입된 원자재 1억3,282만 달러도 대부분 포철을 짓고 공장을 돌리는 데 썼다. 원자재까지 합치면 전체 청구권 자금의 절반 이상을 포철에 투자했다. 다른 나라들은 어떻게 썼나? 일본 정부로부터 대일청구권 자금을 받은 나라는 아시아 5개국. 필리핀, 한국, 인도네시아, 미얀마, 베트남이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이 2,000년에 펴낸 ‘대일 청구권 자금의 활용사례 연구’에서 연세대 경제학과 김정식 교수는 이들 5개국 중에서 한국이 청구자금을 최고로 잘 사용하였다는 결론을 내렸다. 무상자금은 필리핀이 5억5,000만 달러로 제일 많았고, 한국이 3억 달러, 인도네시아 2억2,308만 달러, 미얀마 2억 달러, 베트남 3,900만 달러 순이었다. 일본이 차관 형태로 지원하는 유상자금과 민간이 자금을 지원하는 상업차관을 합칠 경우 한국과 필리핀이 각각 8억 달러로 제일 많았다. 인도네시아는 대통령의 개인별장이 있는 곳에 호텔을 짓고, 부유층을 위한 백화점을 지었다. 청구권 자금의 효율성이 가장 낮은 국가였다. 필리핀은 항만 및 도로건설 등에 사용했지만 당초 댐 건설 및 철도 연장 계획이 계획대로 실시되지 못했다. 대지주와 대자본가 등이 필리핀 정치를 주도하면서 일본의 배상금이 이들의 이권을 채우는 데 활용됐다. 미얀마는 파괴됐던 철도 및 도로 복구 등에 주력하면서도 당시 총리의 ‘복지국가계획’을 성공시키기 위해 사회복지 부문에도 상당액의 자금을 투입했다. 베트남은 전체 자금의 50% 이상을 발전소 및 송전시설에 투입했다. 당시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할 때, 박정희 대통령은 자금 유출에 대해 엄청난 단속을 했다. 당시 경부고속도로 건설현장에는 군의 공병대 장교들이 대거 파견되어 날림공사와 자재 유출을 감시했다. 당시 사회에서 가장 청렴한 집단은 그래도 군인들이었다. 포항제철 공사를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챙기지 않았다면 자금의 수십%가 유출됐고, 중국의 등소평까지도 그토록 부러워했던 오늘날의 포항제철은 없었을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박태준 씨에게 특별한 마패를 만들어 주었다. 세도가들이 찾아와 여러 가지 압력을 넣거나 회유를 할 때마다 보여주면서 이권과 청탁을 물리치라는 것이었다. 박태준씨는 그 마패를 보여주면서 모든 이권과 청탁을 차단했다. 일본의 소니사는 아키오모리타가 이룩한 신화였고, 파나소닉사는 마츠시타고노스케가 이룩한 신화였다. 박정희 집권 초기에는 필리핀과 인도네시아가 한국보다 3배 더 잘 살았지만, 지금은 한국이 이들보다 10-11배나 더 잘 산다. 이는 순전히 박정희가 이룩한 한강의 기적 때문이었다. 이 통계 하나만으로도 오늘의 대한민국은 박정희가 이룩한 신화였다. 아키오모리타와 마츠시타고노스케는 일본 국민의 신앙이지만 한국의 박정희는 세계적으로는 대한민국의 신화를 창조한 위대한 지도자로 인정받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국내에서는 온갖 욕을 다 먹는다. 가론 유다같은 이런 인간들에 대해서는 입에 들어가는 밥숫갈마저 빼내고 싶어진다. 일제 강점 공간의 조선왕국 세계의 유수 열강들은 누가 더 많은 식민지를 보유하느냐에 국가의 프라이드로 여기면서 식민지 쟁탈전에 몰입했다. 그러나 조선만은 이러한 외부 세상에 눈과 귀를 막고 오직 정적을 모함-모략하여 죽이고 귀양 보내는 데만 열중했다. 당시 이러한 나라라면 누구에게든 먹힐 수밖에 없었다. 1905년7월29일, 일본 총리 가쓰라 다로와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의 특사인 육군장관 W.H. 태프트 사이에 비밀협약이 맺어졌다. 미국이 필리핀을 갖는 대신 일본은 조선을 가지라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가쓰라-태프트 밀약이며, 이 밀약에 의해 1910년 을사보호조약이 강요됐다. 러-일 전쟁이 발발 직후 루즈벨트 대통령은 당시 조선을 이렇게 평가했다. “1900년 이래 한국은 자치할 능력이 없으므로 미국은 한국에 대해 책임을 져서는 안 되며,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여 한국인에게 불가능했던 법과 질서를 유지하고 능률 있게 통치한다면 한국을 위해서도 좋은 것이라고 확신한다”. 미국의 원자탄에 의해 한국이 해방됐을 당시에도 미국은 조선에 자치능력이 없다고 생각했다. 만일 당시 조선을 일본이 먹지 않고 러시아나 중국이 먹었다면 우리는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이왕 먹힐 바에야 일본에게 먹힌 것이 천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러시아와 중국은 일본인들보다 더 잔악해게 욕을 보였을 것이다. 그래도 일제 치하에서 공부를 했던 사람들은 선악 구별이 반듯하고 도덕심이 강했다. 일본인 교사들 중에는 나쁜 이들도 있었지만 존경을 받는 교사들도 많았다 한다. 5,000년 역사! 9,000여회의 외침을 받아 오면서 지배계급은 언제나 외세에 영합하면서 부를 누렸고, 나라와 백성을 생각하며 목숨을 버린 사람들은 민초들이었다. 그 민초에서 우뚝 선 지도자들이 바로 이순신-안중근-유관순 같은 사람들이었다. 이승만과 박정희 역시 이런 민초들에서 피어난 꽃들이었다. 이순신, 안중근, 유관순은 민초에서 피어난 정신적 지도자들이었지만, 이승만과 박정희는 국가를 위기에서 건져내고, 현대적 민주국가의 틀을 세우고, 세계에서 꼴찌로 못 사는 거지의 나라를 경제 10위권 국가로 우뚝 세울 만큼의 지도능력을 갖춘 민초출신의 위대한 지도자였다. 당시 조선 인구의 80%는 농업인구, 80%가 한글마저 배우지 못한 문맹, 그야말로 한심한 국가였다. 혁명공간의 한국 경제 1945년에서 1959년까지의 15년간, 미국으로부터 제공받은 원조액은 연평균 1억8천만 달러. 현금이 아니라 물자였다. 정부는 미국에서 받은 잉여농산물, 유연탄, 석유 등을 시장에 팔아 그 돈으로 세출예산을 세웠다. 기업이 없고, 80%의 인구가 피폐한 농촌에서 초근목피로 연명하다가 피똥을 눟는 환경 하에서 세금이 어디에서 걷혔겠는가. 잉여농산물 유입은 농촌을 피폐화 시켰고, 젊은이들의 이농현상을 초래하여 수백만의 실업자를 유발시켰다. 해방 이래 보잘것없긴 하지만 그 나마의 대기업들은 위에다 정부예산을 부어넣고, 밑에서는 업주와 정치인 및 관리들이 빼가는 돈 통에 불과했다. 밀수품이 범람하고 정경유착으로 사회는 부패할 대로 부패해서 국가의 운명이 암담하기만 했다. 고관대작들은 축첩과 양주와 춤으로 사치와 방탕에 빠졌고 대부분의 정치꾼들은 사기꾼 같았다. 1961년, 박대통령은 장충단 공관에서 집필한 그의 메모식 저서 "국가와 혁명과 나"에서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1956년부터 1962년까지 7개년간의 원조는 연평균 5억 달러였다. 경제원조가 2.8억불, 군사원조가 2.2억불이다. 환언하면 한국경제가 완전히 자립하자면 군사 면을 제외하고도 2.8억불과 무역적자 5천만 불을 합쳐 3.3억 불을 새로이 벌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 그렇게 된다 해도 이는 현상유지 하는 데 그치는 일이다. 이에 가중되는 연평균 2.88%의 인구 증가, 즉 72만 명의 압력은 어찌할 것인가?" "원조를 받지 않고 우리의 힘으로 경제를 운용하는 것은 기적 이외에 바랄 것이 못되지 않는가? 위기를 고하는 수많은 국민의 생활난, 해마다 늘어만 가는 식량부족, 30%의 실업률, 모두가 시급한 해결의 길을 바라고 있는데 반해 해결방안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실업률 30%! 지금의 실업률은 얼마인가? 3.5%. 매년 30만 명의 대학생들이 졸업을 하지만 겨우 5,000명 정도만이 취직을 하는 지금의 실업률이 겨우 3.5%라 하니, 당시의 30% 실업률이 얼마나 살인적인 것이었겠는가! 5.16혁명! 미국은 박정희 혁명세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다른 나라들에서도 똑같은 상황이 발생할 것이라는 우려에서였다. 미국은 주던 원조도 중단했다. 당시 미국 대통령은 존 에프 케네디, 박정희 소장은 케네디를 만나기 위해 백악관을 찾았지만 케네디는 끝내 만나주지 않았다. 짐을 싸면서 박정희 소장과 수행원들은 서러워서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서독에 광부를 팔고, 간호원을 팔았다. 고졸 출신 파독 광부 500명을 모집하는 데 4만6천이 몰렸다. 학사 출신도 수두룩했다. 손이 고우면 떨어질까 연탄에 손을 비비며 손을 거칠게 만들었다. 어린 간호사들은 울면서 거즈에 알콜을 묻혀 딱딱하게 굳어버린 시체를 이리저리 굴리며 하루 종일 닦았다. 광부들은 지하 1000미터 이상의 깊은 땅 속에서 뜨거운 지열을 받으며 열심히 일했다. 하루 8시간 일하는 서독 사람들에 비해 열 몇 시간을 그 깊은 지하에서 석탄을 캤다. 서독 방송, 신문들은 대단한 민족이라며 가난한 한국에서 온 간호사와 광부들에게 찬사를 보냈다. “세상에 어쩌면 저렇게 억척스럽게 일 할 수 있을까?” 이들에 부쳐진 이름이 ‘코리안 엔젤’이었다. 이들을 방문한 박정희! “우리 열심히 일 합시다. 후손들을 위해서 열심히 일 합시다.” 얼굴이 찌든 광부와 간호사들에게 그는 이 말만 반복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광부와 간호사들이 몰려나와 육 여사와 박대통령의 옷을 잡고 통곡했다. 광부들이 뤼브케 대통령 앞에 큰 절을 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한국을 도와주세요. 우리 대통령님을 도와주세요. 우리 모두 열심히 일 하겠습니다. 무슨 일이든 하겠습니다.” 뤼브케 대통령도 울었다. 호텔로 돌아가는 차에서도 박 대통령은 계속 눈물을 흘렸다. 옆에 앉은 뤼브케, 손수건을 주면서 힘주어 말했다. “우리가, 서독 국민들이 도와 주겠습니다.” 서독 국회에서도 연설을 했다. “돈 좀 빌려주세요. 한국에 돈 좀 빌려주세요. 여러분들의 나라처럼 한국은 공산주의와 싸우고 있습니다. 한국이 공산주의자들과 대결하여 이기려면 분명 경제를 일으켜야 합니다. 그 돈은 꼭 갚겠습니다. 저는 거짓말 할 줄 모릅니다.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은 절대로 거짓말하지 않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을 이길 수 있도록 돈 좀 빌려주세요.” 유엔에 등록된 나라 수는 120여 개국, 당시 필리핀 국민소득 170불, 태국 220불등 이때, 한국은 68 달러였다. 우리 밑에는 달랑 인도만 있었다. 북한은 우리보다 2배, 필리핀은 3배나 더 잘 살았다. 가발을 만들어 내다 팔았다. 동네마다 엿장수가 다녔다. “머리카락 파세요!” 아낙네들이 머리카락을 잘랐다. 서울 간 아들놈 때문에 잘랐고, 쌀을 사기 위해 잘랐다. 싸구려 플라스틱으로 예쁜 꽃을 만들어 수출을 했다. 곰 인형도 팔았다. 쥐잡기 운동! ‘코리안 밍크’도 만들어 팔았다. 돈 되는 것은 무엇이던지 내다 팔았다. 1965년, 수출이 1억 달러였다. 세계가 놀랐다. 그들은 이를 ‘한강의 기적’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혁명공간의 한국 안보 1961년7월, 중공과 북한 간에 혈맹적 동맹조약이 체결됐다. 소련, 중공, 북한이 이루는 북방 삼각세력의 팽창 정책이 공조체제를 가동하기 시작했다. 1962년 12월, 김일성이 "4대 군사노선"을 발표했다. 1964년, 중공이 핵실험에 성공했다.1965년4월, 김일성이 ‘남조선 통일을 위한 3대 혁명론’을 발표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남한의 입지는 점점 더 약화되어 갔다. 미국에서는 월남전의 확전으로 인해 남한에 공여하던 원조를 삭감하는 한편 주한미군을 월남에 투입할 수밖에 없다는 정서가 확산됐다. 북한은 공세의 고삐를 바짝 조여가고, 미국은 발을 빼려하고, 그야말로 한국은 누란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공산화 도미노 현상은 매우 위협적이었다. 인도네시아가 공산화되고 월남마저 공산화되면 그 다음 차례는 한국이었다. 월남전은 한국 제2의 전선이었다. 전 거물간첩 김용규 선생은 그의 저서 [소리없는 전쟁](1999. 원민) 81쪽에서 4.19를 이렇게 회상했다. “4.19 때에도 시위학생들이 가자 북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 이런 구호를 외치며 왁시글거리지 않았습니까? 그 때도 제가 서울에 있으면서 학생시위를 지도했습니다”. 이명영 교수(서울대 졸업, 정치학 박사, 중앙일보 본설위원)는 그의 저서 [통일의 조건-발상의 전환을 위하여]라는 저서에서 “1972년1월, 간첩 이석과 그의 공작망이 국군보안사령부에 의해 검거되자 그는 수사관 앞에서 담담하게 말했다. "4.19 혁명의 도화선에 불을 지른 사람이 바로 나입니다". 김용규 선생은 이렇게 털어놓았다. 북한은 4.19 혁명이 실패한 것에 대해 몹시 후회했다. 그리고 그 원인을 진단했다. (1) 남한에 혁명을 수행할 수 있는 정당이 없었고, (2) 명확한 투쟁강령이 없었고, (3) 노동자-농민의 참가가 없었다.그래서 1964년 3월15일, 서울에서 발족된 것이 [통일혁명당창건준비위원회]였다. 이 준비위원회는 비밀조직으로는 [민족해방전선]을 두고, 합법적 조직으로는 [학사주점], [새문화연구회], [청맥회], [동학회], [민족주의연구회] 등의 써클을 두었고, 당기관지로는 [혁명전선]이라는 지하신문을, 합법적 잡지로는 [청맥]을 발간하여 반미 사상, 반정부 사상을 고취하고, 민족 및 노동자-농민에 대한 계급의식을 확산시켰다. 1964년의 6.3한일회담반대 투쟁, 1965년8월의 한.일협정비준반대-투쟁, 1969년의 험프리 미부통령 및 일본의 佐藤 수상 내한반대-투쟁, 1969년 7월의 3선개헌반대-투쟁을 선동했다. 그러나 이들은 1968년8월24일 한국정부에 의해 발각되었다(73명을 구속, 85명을 조사중이라고 발표). 모든 반정부 불만을 소요와 폭동으로 교묘하게 연결시킨 배후에는 반드시 지하당의 선전-선동과 전문적인 연출세력이 개입돼 있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민주화]는 1960년대부터 북이 남한의 불만세력을 선동하기 위해 사용한 위장용어였고, 남한의 민주화운동은 북의 지령이었다. 남한에의 민중정부 수립은 김일성의 목표였으며 4.19를 북한에서는 [4.19민중항쟁]으로 부르고 실패한 통일 기회로 기억한다. 남한에서 발생한 모든 소요사태의 배후에는 언제나 북한의 개입이 있었다. 한일협정 반대 시위의 배후에도 북이 있었다. 굴욕외교라고 비분강개한 대학생들의 정서를 이용해 뒤에서 불길을 크게 키운 것이 북이었다. 김대중, 김영삼, 문익환, 함석헌, 장준하 들이 그 불길의 중심에 서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케네디에 돈을 꾸러 가고, 서독에 가서 광부 간호사와 함께 통곡을 하고 있을 때, 김대중-김영삼-문익환 등은 무얼 했는가? 고속도로를 놓을 때에는 알통 같은 농지를 절단 낸다고 욕을 했고, 국군을 월남에 보낼 때에는 젊은이들의 피를 팔아먹는 악마라며 욕을 해대면서 오직 개인들의 정치적 욕심만 채우고 있지 않았던가. 김대중! 금강산 사업, 평양체육관 건설, 자동차공장 건설 등 합법적인 방법으로 북한에 5조에 가까운 국가재산을 퍼주었고, 국민 몰래 5억 달러 이상의 군자금을 적장에게 바쳤으며, 자신은 아방궁을 지어놓고 호화롭게 살고 있다. 이런 자에게 당시의 청구자금이 갔다면 김대중은 그 돈을 어디에 썼을까? 참으로 아찔해진다. 박정희! 진해 별장에서 기자들에게 허리띠를 보여주었다. 나긋나긋하게 얇아져있는 허리띠였다. 모든 기자들이 숙연해 했다. 물을 아끼려고 화장실 물통에 벽돌을 넣었다. 그가 가장 아끼던 사람들은 공돌이와 공순이였다. 그는 이들에게 야간학교를 다니도록 해달라며 고용주들에게 절을 하는 자세로 편지를 썼다. 서거한 다음, 그가 단돈 몇 푼이라도 감추어 놓았다는 증거는 아직 하나도 없다. 그가 도둑이면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도둑일 것이다. 누구든 박정희를 도둑이라고 주장하려면 증거를 댐과 동시에, 그 자신의 도덕성부터 공개해야 할 것이다. 월남 파병의 기적 1966-1972년간 월남에서만 직접 획득한 외화는 8억7,250만 달러였다. 이중에서 장병 송금액은 1억7,830만 달러로 베트남으로부터의 송금된 전체 외화의 20.4%에 불과했다. 나머지 80%는 베트남으로의 수출, 베트남에의 군납, 파월 기술자 송금, 파월 지원경비, 파월 건설 및 용역에 의한 수입이었다. 미국의 후원과 한국군의 맹활약, 월남특수가 일궈낸 "신인도"에 따라 외국자본이 물밀 듯 들어왔다. 원조, 차관, 상품 및 용역 수출의 물꼬가 터졌다. 1965-1972간 외자 도입액은 32억8,820만 달러나 됐다. 대미수출을 보자. 1964년에 3,600만 달러였던 것이 10년 만인 1973년도에는 무려 10억2,120 달러로 28.3배로 도약했다. 주한미군이 한국에 뿌린 돈이 8억 달러, 군원이관 중단액이 9,300만 달러 등 총체적으로 한국군이 월남특수로부터 거두어들인 경제적 이익은 50억 달러 이상으로 추산된다. 장병 1인당 17,000 달러씩 국가에 기여한 것이다. 이는 소위봉급 83년 치에 해당하는 돈이다. 이는 장장 14년간의 교섭 끝에 1965. 6.3일에 얻어낸 대일 청구자금 즉 무상원조 3억 달러, 재정차관 2억 달러, 상업차관 3억 달러, 도합 8억 달러에 비하면 엄청난 금액이다. 외화보유고를 보자. 1964년도 외환보유고는 겨우 1억 2,800만 달러였으나, 1975년에는 15억4,000만 달러, 1978년에는 49억4,000만 달러로 폭증했다. 남북한 1인당 GNP를 보자. 1953년, 남북한 1인당 GNP는 각기 67 달러와 53 달러로 남한이 1.2배 더 높았다. 그러나 1959-1965 6년간에는 역전됐다. 남한이 북한의 60-70% 수준으로 추락했다. 그러나 월남이 패망한 1975년에는 남한이 북한보다 1.4배 앞섰고, 지금은 29배로 앞서가고 있다. 한국군은 월남의 8개항만 중 5개를 장악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월남의 주요 공사는 한국 기업이 맡았다. 당시 천막회사였던 한진과 현대는 기술도 없이 담요나 모기장 그리고 급수 대책도 없이 무작정 월남 땅으로 상륙했다. 한진은 월남에서 1.5억 달러를 벌어들였고, 현대는 캄란 부두 공사 500만 달러를 비롯하여 연평균 100만 달러 이상의 계약고를 올렸다. 1974년초 청와대 오원철 경제 수석이 박대통령에게 건의했다. "중동은 고온에다 모래 바람이 부는 열악한 땅이다. 금녀, 금주의 땅이라 선진국 근로자는 아무리 돈을 많이 줘도 가려 하지 않는다. 우리에겐 군인 정신으로 무장된 수십만의 제대 장병이 있습니다. 월남 참전 용사들도 많습니다. 여자 근로자가 만든 상경공업 상품을 수출하여 지탱해오던 한국경제의 패턴을 바꿔야 합니다". 1965년-75년 9년간 중동건설 수주액은 불과 2,400만 달러였다. 1974년에는 8,900만 달러, 1975년에는 7억5천만 달러, 76년에는 24억3,000만 달러, 77년에는 33억 8,700만 달러, 78년에는 79억 8,200만 달러를 기록했다. 오늘날의 기록과 비교해 보라. 그 엄청남 기술과 해외수주 기록을 가지고도 지금 현대를 비롯한 한국의 모든 건설업이 중동 수주에 냉대를 받으면서 줄줄이 도산하고 있지 않은가? 박대통령이 집권하기 이전에 한국엔 일자리가 없었다. 당시의 공식 통계만으로도 실업률은 1963년 29.9%, 1964년에는 29.7%였다. 공장이라고는 겨우 제분, 제당, 제약 회사들과 같은 것뿐이었고, 기계공업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 손톱깎이 하나 제대로 만들지 못했다. 강도와 정밀도를 규정하는 스펙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사회 전체가 무력감으로 가득 차 있었고, 청년들에겐 앞길이 막막했다. 박대통령은 월남에서 벌어들인 돈을 가지고 경부선, 댐공사, 발전소 등 대규모 인프라를 건설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능학교들을 세워 기능공을 대량으로 양성했다. 국제 기능올림픽에서 금메달은 한국이 독차지했다. 한국은 기능공의 나라가 됐다. 박대통령은 외국에 특사들을 내보내 한국에 값싸고 질 좋은 기능공들이 많으니 들어와 공장을 지어달라고 호소했다. 대통령을 신뢰한 외국기업들이 줄줄이 들어와 공장을 지었다. 일자리가 갑자기 늘어나기 시작했다. 눈물과 한숨의 대명사 "보리고개"라는 말이 없어지는 순간이었다. 1960년, 필리핀, 태국, 인도네시아는 우리에게 한참 우러러 보이는 선진국, 모두가 우리보다 3배나 더 잘 살았다. 그러나 지금 현재는 어떠한가? 필리핀은 1인당 국민소득 1,030달러, 우리의 11분의1이다. 인도네시아는 968달러, 태국은 1,940달러, 북한은 580달러, 한국은 17,000달러, 모두가 한국에 비해 새카맣게 뒤떨어졌다. 박정희가 이룩한 신화는 기적 그 자체였다. 박대통령의 일자리 만들기, 누구도 흉내 못내 세계인들은 뉴딜 정책이 8백만 일자리를 만들어 낸 것에 대해 두고두고 칭송한다. 하지만 박대통령의 일자리 만들기는 이보다 훨씬 더 기막히다. 앞이 보이지 않던 그 시대에 어떻게 기능공을 양성해서 일자리를 폭발적으로 만들어 낼 생각을 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필자는 지금도 혀를 찰 만큼 감탄하고 있다. 첫째 그는 기능학교들을 만들어 기능공을 대량으로 길러내기 시작했다. 대통령은 이들 기능공들의 친구가 됐다. 기능공들은 국제기능올림픽에 나가 금메달을 따는 게 소원이었다. 매년 금메달은 한국이 독차지했다. 국제사회에서 한국은 기능공의 나라가 됐다. 공장장이 사장보다 더 높은 월급을 받았다. "대학가야 소용없다, 기술을 배워야 대우 받는다"라는 말이 사회적 유행어가 됐다. 외국에 특사들을 내보내 한국에 값싸고 질 좋은 기능공들이 많으니 들어와 공장을 지어달라 호소했다. 박대통령의 약속을 신뢰한 외국기업들이 줄줄이 들어와 공장을 지었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하는 일이라 중간에서 공무원들이 장난질을 하지 못했다. 한국이 조립을 많이 해서 팔면 그만큼의 부품과 소재들을 앉아서 팔 수 있었기 때문에 한국에 공장을 짓는 것은 외국기업에게 또 다른 매력이었다. 한국의 일자리는 이렇게 해서 갑자기 늘어나기 시작했다. 둘째 그는 한편으로는 대규모 공단을 지어 기업인들을 입주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 기업들에게 외국에서는 이미 사양화 돼 가는 수많은 제품들에 대한 기술도면을 얻어다 주었다. 그러나 공장에는 외국어로 쓰여진 기술자료(TDP)를 해석하는 사람들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외국에 나가있는 과학기술자를 대거 유치하여 기업을 지도하게 했다. 생활필수품마저 고갈됐던 당시엔 한동안 물건이 없어서 못 팔 판이었다. 굶주린 배에 음식이 한없이 들어가듯 만들기만 하면 모두가 팔렸다. 공장을 가진 기업들은 한동안 땅 짚고 헤엄치듯이 돈을 긁어 부자가 됐다. 기업은 날로 번창하고 생산 설비는 더욱 팽창했다. 그만큼 일자리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던 것이다. 바로 이런 것이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과학적인 방법이었다. 그는 여기에 멈추지 않았다. 당장에 일자리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는 미래에 일자리를 만들어낼 수 있는 원동력을 키우는 데에도 착안을 했다. 참고로 그가 얼마나 미래 지향적이었는지는 창원 공단에 나있는 광활한 도로 폭을 보면 잘 나타나 있다. 주위의 의아심을 무릎 쓰고 그는 넓은 도로를 건설할 수 있는 땅을 그때에 사두었다. 훗날 땅값이 오르면 넓은 도로를 건설할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빠듯한 나라 살림에서도 오늘날의 과학 단지를 만들어 냈다. 과학 단지야말로 미래의 일자리를 만들어 내는 핵심적 원동력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과학자들에게 파격적인 대우를 해주고 그들 곁을 자주 찾았다. 대통령을 좋아한 나머지 과학자들 중에는 과로를 반복하다가 순직한 이들도 꽤 있었다. 과학촌 수장들이 박대통령을 만나기 원하면 대통령은 국무회의 중에도 만나주었다. 대통령이 이렇게 하니까 장관들이나 공무원들이 과학자들을 지금처럼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대전에 있는 국방과학연구소에는 그가 며칠씩 머물던 방이 있었다. 그 방은 과학기술에 대한 그의 일선 지휘소였다. 그러나 그가 떠나고 난 지금까지 그 방을 찾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후의 대통령들에게는 과학이 입으로만 중요했다. 국가경영능력만을 보면 박대통령은 100년에 나올까 말까한, 사람이라는 걸 필자는 믿고 있다. 외국 지도자들은 그의 국가경영능력을 매우 높게 평가한다. 등소평이 박정희를 숭상한 이래 중국은 지금 박정희를 경제선생님으로 모시고 경제성장에 박차를 가하고 있으며 베트남의 도이모이 역시 그의 성장모델을 따르려고 노력하고 있다. 한국의 누가 뭐래도 박정희는 아시아 10대 인물 중 상석에 속해있다. 반면, 김대중의 일자리 만들기를 보자. 공공근로 사업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세금을 배급해 주었다. 들에 가서 풀을 뽑고 코스모스를 심으면서 절반 이상을 놀다가 오면 하루에 22,000원을 주었고, 산에가서 나무를 벤다며 소주 마시고 낯 잠을 자다 오면 37,000원씩을 주었다. 이렇게 쉽게 돈을 버니까 이들은 공장이나 들에 나가 힘들게 일하고 싶지 않았다. 김대중의 일자리 만들기는 사실상 일자리 죽이기였다. 김대중 정부에서 무너진 기업 수는 사상 최고에 이르렀고, 김대중은 기업죽이기의 명수였다. 시쳇말로 쨉이도 안 되는 매국-빨갱이 정치꾼이 배우지 못한 무리들을 이끌고 박정희를 폄하하고 있는 것이다. 한일협정은 굴욕외교였나? “청구자금이 적어도 50억 달러는 돼야 했다”는 근거 없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박정희 죽이기에 나섰다. 한일협정이 체결되던 1965년, 일본의 외화보유고는 겨우 14억 달러, 일본은 한국말고도 미국의 압력에 못 이겨 4개국에 돈을 주었다. 모두 14억 달러가 넘는 돈이었다. 청구권이라는 것은 일본이 지은 죄 값을 의미했다. 주고받는 것은 손 벽이 마주쳐야 한다. 당시 일본인들의 생각은 어떠했는가? 일본인들이 제로 전투기를 만들고, 항공모함을 만들어 미국에 대적했을 때까지도, 조선은 손바닥만한 창경궁에서 서로 모함하고 모략하면서 싸움질하기에 바빴을 것이다. 일본인들이 건설한 철로와 도로, 그리고 지금까지도 끄덕 없이 공고하게 유지되는 교량과 터널, 항만, 발전소, 비행장을 당시의 위정자들이 건설할 수 있었을까? 루즈벨트 대통령은 당시의 조선을 자치 능력이 없는 나라, 현대적인 법률과 행정기구를 만들어 낼 수 없는 미개국이라며 일본에 통치권을 허용해 주었다. 일본인들 역시 자기들이 아니었으면 한국의 개화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한국 국민의 고혈을 짰다고 하지만 일본 총독부가 한국에서 거둔 자원만을 가지고 사회간접자본을 건설한 것이 아니었다. 일본의 유수한 기업들이 자본을 투자했다. 조선왕조의 능력으로는 총독부건물, 화신, 신신, 반도 등 당시 최대규모의 건물들도 지을 수 없었고, 더구나 항만, 철로, 발전소,도로 등을 건설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패전 후 일본은 그들이 이룩해 놓았던 모든 자산들을 고스란히 두고 갔다. 이들 자산들의 가치가 모두 얼마일 것인가? 36년간 피해를 끼친 것은 인정하나 배상금은 줄 수 없다는 것이 일본인들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렇다면 일본은 어째서 한국에 돈을 주었는가? 미국 때문이었다. 미국이 일본을 욱박질렀다. 8억 달러는 일본의 국력으로써는 상당한 거액이었다. 이로 인해 일본의 대학생과 지식층들이 '굴욕외교'라며 길거리에 나서 일본 정부를 성토했다. 박정희를 성토하고 싶은 사람들은 “일본에서 받은 돈이 적다. 더 받아내자”고 지금도 우물 안에서 소리를 높이지만 우리 못지않게 피해를 보고 학살까지 당한 중국은 한때나마 일본에 점령당했다는 사실이 부끄러워 돈 달라는 소리를 절대로 하지 않는다. 중국은 앞으로도 배상금을 달라지 않을 것이다. 싱가포르 이광요 수상도 치사하게 배상금을 달라 하지 않았다. 바로 이게 자존심이다. 자존심도 모르는 거지근성을 가진 사람들, 영혼에 때가 묻은 이런 사람들 때문에 대한민국은 세계 도처에서 멸시를 받고 있으며, 유독 대한민국의 시계만 거꾸로 돌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받은 것은 정확히 얼마인가? 무상 3억 달러가 전부인가 아니면 8억 달러가 전부인가? 8억 달러 말고 더 있는가? 국교가 정상화되고, 박대통령의 일자리 불리기가 시작되면서 일본의 자본과 기술이 물밀듯 몰려들었다. 포항제철에 들어 간 기술 대부분이 일본 기술과 자재였다. 국가 전체에 유입된 일본과 미국의 자본과 기술을 비교해보면 7:3으로 일본이 앞섰다. 박정희를 비하하려는 사람들은 별로 배우질 못해서 지금 이 순간까지도 일본의 기술 및 자본 유입을 경제적 침략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런 사람들은 박정희를 입에 담을 자격조차 없는 함량미달들이다. 일본의 기술과 자본이 없었다면 1997년도에 이룩한 1만 달러 시대는 열리지 않았을 것이다. 잠시 제조업을 생각해 보자. 눈에 보이는 비용은 불과 몇 개에 불과하다. 재료비, 인건비, 보증수리비, 검사비, 하자수리비, 테스트비, 재작업량, 반품 및 폐품처리비들이 바로 눈에 보이는 비용들이다. 그러나 장부에 잡히는 이런 비용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비용이 더욱 크다. 단지 무식한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을 따름이다. 제품이나 서비스에 불만을 품고 말없이 발길을 돌리는 고객으로부터 발생하는 기회비용이 무식한 사람들의 눈에 보이겠는가? 설계변경으로부터 발생되는 비용, 설계시간이 많이 걸려서 시기를 잃는 경우의 비용이 그런 이들의 눈에 보이겠는가? 기계고장으로 발생되는 비용, 근로자가 자존심을 잃음으로써 발생되는 비용이 장부에 기록돼 있는가? 복잡한 행정으로 인해 야기되는 비용, 애매한 목표와 기준으로 인해 발생하는 비용, 행정의 복잡성과 무능 그리고 행정 지연으로부터 발생되는 비용, 직장내의 불쾌감으로부터 발생되는 비용, 하청업체를 과도하게 경쟁시킴으로써 발생되는 비용, 비생산적인 회의로부터 발생되는 기회비용 등이 회계장부에 잡히는 비용인가? 무능한 경영인들은 눈에 보이는 비용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다. 그러나 유능한 경영자의 눈에는 수면 하에서 보이지 않고 유발되는 비용이 더 크게 보인다. 신중을 기한다고 행정을 미루고 있는 동안 경쟁업체는 새로운 제품을 가지고 시장을 누빈다. 이런 비용은 회계 장부에 없고 그래서 비용으로 보이지 않는다. 한일협정으로부터 들어온 이익 역시 이러한 식으로 무능한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조금 더 많이 받아내자고 떼를 쓰고 있는 동안 한국을 지지했던 미국의 마음이 식상해질 수도 있으며, 기다리면 기다릴수록 기회만 놓치고 시간만 허송한다. 만일 더 기다렸다가 그 배상금을 김대중이 탔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만일 가다렸다가 그 후의 다른 대통령들이 받았다면 그들은 그 돈을 어떻게 사용했을까? 자기들도 뜯어가고 집행과정에서 온갖 세도가와 사기꾼들이 달려들어 줄줄이 새어나갔을 것이다. 고쳐야 할 한국인의 정신: 안에서 잃은 것을 밖에서 찾자 덴마크! 인구는 겨우 500만, 국토는 한국의 5분의 1, 땅은 모래밭과 황무지, 그러나 지금은 국민소득 33,000달러의 선진국이다. 1813년부터 나폴레온 전쟁에 휘말려 곤궁할 대로 곤궁해진 터에 또 다시 영국과의 7년 전쟁을 치르면서 넓고 비옥한 땅을 모두 빼앗겼고 남은 것은 노약자와 부녀자 뿐이었다. 절망이었다. 일할 마음도 생기지 않았다. 이때에 나타난 [그룬트비란]이 정신적 혁명을 일으켰다. “밖에서 잃은 것을 안에서 찾자!” 국민 정신이 바뀌자 국가가 바뀌었다. 한국인 졸부가 일본 최고의 호텔에 머물면서 최고로 비싼 그림 한 점을 배달시켰다. 배달원은 자기가 잘못을 저질렀다며 머리를 조아렸다. 겉으로 보기엔 멀쩡했다. 무엇 때문에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포장지에 약간의 자국을 가리켰다. 싸고 또 싼 것이라 그림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일본인들은 포장도 상품으로 취급한다. 용서만 해주신다면 금전적 보상은 얼마든지 하겠다며 머리를 조아렸다. 그 한국인에게 순간적인 욕심이 발동했다. 그림 값에 버금가는 많은 돈을 요구했다. 배달원은 그 많은 돈을 내놓으면서 고맙다고 머리를 조아리면서 나갔다. 영악해 보이는 한국인, 그 영악해 보이는 것만큼 한국 사람들이 잘 사는가? 어수룩해 보이는 일본인, 그 어수룩한 것만큼 일본인들이 못사는가? 일본인은 아픈 것만큼 자기관리를 했을 것이다. 그 결과 일본인은 엄청난 가치를 창출했을 것이다. 밖에서 많이 얻으면 얻은 것만큼 사람의 정신을 병들게 한다. 안에서 얻은 것이 밖에서 얻는 것보다 많다는 것을 우리는 늘 기억해야 한다. 필자는 미국인 역사학자를 친구로 한 적이 있었다. 그의 부친은 미국 증권시장 부회장으로 미국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유명했다. 부친이 아들에게 재산을 상속하려 했다. 그는 거절했다. 아들을 낳은 기념으로 은그릇을 나눠주려 했다. 또 거절했다. 마음은 감사하지만 그걸 받으면 자식의 정신이 병든다는 것이 이유였다. "제가 아버지로부터 받으면 그 후 제가 아무리 더 많은 것을 보태도 그건 제가 이룬 것이 아닙니다. 저는 제 스스로 이루어 보겠습니다". 전후에 일본인들은 미국을 무작정 증오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미국으로 건너가 거지처럼 공장 문 밖을 기웃거렸다. 이를 불쌍하게 여긴 미국인들은 그런 일본인들을 멸시했다. "일본인들은 죽었다 깨나도 미국을 따라올 수 없을 것이다. 문을 활짝 열고 다 보여줘라". 1962년 당시 덜레스 미국무장관이 수많은 군중을 향해 미국의 우월감을 이렇게 표현했다. "일본은 기술 측면에서 영원히 미국과 경쟁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일본은 지금 매우 훌륭한 손수건과 훌륭한 파자마를 생산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 것들을 미국에 수출하려 하지 않습니까?". 미국 공장을 기웃거리는 꼴사나운 정경을 멸시하는 연설문이었다. 당시 미국은 세계 GNP의 54%를 차지하고 있었다. 가의 모든 생산기지가 미국에 있었고, 세계의 신제품은 모두가 "MADE IN U.S.A" 였다. 미국인들의 우월감은 바로 여기에서 기인했다. 그들은 미국에서 만들어 지지 않은 모든 제품을 쓰레기처럼 경시했다. 이를 NIH 증후군(Not Invented Here Syndrome)이라고 불렀니다. 이러한 모욕을 무릅쓰고 일본인들은 미국으로부터 선생님을 불러들이고 미국을 견학하면서 미국을 모방하려 애썼다. "미국을 모방하자" 영어로는 "Copy the West"가 당시 일본인들의 목표였다. 일단 모방한 다음에 그들의 목표는 "미국을 따라잡자" 영어로는 "Catch up with the West"로 바뀌었다. 이때부터 거꾸로 미국이 일본을 배우려고 팔을 걷었다. 그 결과 1982년 즉 덜레스 미국무장관의 조롱 섞인 연설 이후 20년만에 승용차에 대한 고객만족도 조사에서 일본 승용차가 나란히 1,2,3위를 차지했다. 반면 미국 차는 겨우 7위를 차지했을 뿐이다. 일본을 정말로 증오하는 사람은 일본을 배워 일본보다 더 훌륭하게 성장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일본의 배우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제발, 이제는 더 이상 치사해지지도 말고, 더 이상 비참해지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 당시 박정희의 선택 더러는 박정희가 청구권 자금을 유용했거나 편취했다고 근거 없는 비난을 하지만 다른 대통령에게 맡긴 세금은 상당부분 증발됐어도, 박대통령에 맡긴 청구자금은 포항제철공장, 소양강 댐, 고속도로 등에 다 들어 차 있다. 그리고 그 투자가 오늘날의 한국을 일으켜 세웠다. 5,000년 역사를 통해 가장 못나고 가장 가난했던 한국을 세계 12위 경제 국가로 일으켜 세웠다. “조센진이 뭐 하나 제대로 하겠어?” 자학과 무능에 빠진 한국인에게 우리도 하면 세계 정상이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어준 정신적 지도자였다. 박정희 정부가 받은 청구권 자금에 대한 문제는 무엇인가? 청구권 자금을 103만 피해자들에게 나누어주지 않고 포항제철에 쏟아 부은 것이 잘못이었다는 것이다. 미국 정부는 지금도 고민을 한다. “현재의 제한된 국방비를 가지고 '현재의 무기'를 사야 하느냐 또는 '미래의 무기를 만들기 위한 생산시설'을 사야 하느냐”(Weapons now or weapons future). 청구권 자금 사용에 관한 의사결정 문제도 이와 똑같은 것이다. 103만은 일본에게 그냥 해보는 소리였다. 당시 전국을 조사했지만 모든 읍면동에서 나오는 자료는 허무맹랑한 자료이어서 신뢰성이 없었다. 불과 20년 전인 광주사태에서 피해를 본 사람들은 불과 200명 수준, 가까운 역사, 매우 적은 숫자에 대한 증거 자료도 매우 부정확했다. 지금부터 불과 30년 전, 베트남에 참전했던 전우들에 대한 기록도 없다. 개인이 월남전에 참전했는지에 대해 증명할 수 있는 자료는 정부에 없다. 개인이 보관했던 사진과 지휘관들의 증언 같은 것들을 이용해 본인 스스로 증명해야 한다. 그런데 100년 전에 누가 피해를 보았는지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 것인가? 설사 모든 증거자료가 있는 피해자들이 있다고 하자. 그들에게 청구자금을 모두 나누어 주었자면 우리는 지금 매우 가난하게 살았을 것이다. 박정희의 야무진 투자와 경영관리의 덕택으로 대한민국이 잘 살고 있다. 피해를 봤던 사람들도 잘 살고 있다. 그것이 바로 명예로운 보상이 아닌가? 안중근 의사, 이준 열사 유관순 등의 열사들은 자기의 몸을 국가에 바쳤다. 피해를 봤던 사람들은 그래도 박정희 덕분에 이렇게 목숨바친 열사들보다는 인생을 더 오래 살아오지 않았는가? 피해자들에 마음으로부터의 동정과 사랑을 표하고 싶다면 지금 잘 살고 있는 대통령과 부자들부터 돈을 걷어 위로금을 전달해야 할 것이다. 생각할 게 또 있다. 지금 북한에서 김정일의 학정에 시달리는 동포들은 무슨 보상을 받았는가? 남한에서 살아온 일제 피해자들은 박정희의 덕을 보았지만, 북에 있는 동포들은 박정희의 혜택은커녕 김정일 학정 하에서 굶어죽고 맞아 죽고 짐승 같은 노역에 시달리고 있다. 일제 피해자들에 동정심을 표하는 사람들이여, 필자는 당신들의 그 높은 체 하는 도덕심을 믿지 않는다. 남한에 사는 일제 피해자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수준에서 고생하는 북한 인권에 대해 당신들은 왜 말이 없는가? 아무런 죄 없이 북한에 끌려간 납북자와 그 가족들의 아픔에 대해서는 왜 말이 없는가? 이 나라를 지키려다 북에 억류돼 있는 국군포로에 대해서는 왜 침묵하는가? 도덕심 높은 체 하는 그대들이여, 당신들이 일제 피해자들을 진정으로 생각한다면 그들보다 더 불쌍한 이런 사람들을 위해 말 한마디라도 해야 하지 않는가? 필자는 미국에서 분석(Analysis) 분야에 평균 이상의 고급 교육을 받은 사람이며 국가경영에 남다른 노하우를 가지고 있다고 자부한다. 나이는 60 이 넘으며 지금도 촌음을 아껴 쓰며 자기 발전에 힘쓰는 사람이다. 이런 지식, 지혜, 연륜을 가지고 있는 필자가 1965년 당시의 박정희의 자리에 섰었다면 필자 역시 박정희와 똑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간단히 잘라서 말해 보라. 당신들이라면 그 청구자금을 피해자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과, 포항제철 등에 투자하는 것 두 가지 대안 중에서 어느 것을 선택했었겠는가를! 과거사가 폭로될수록 사람들은 박정희의 업적에 대해 더욱 더 많이 알게 될 것이고, 따라서 박정희에 대한 80%의 현 지지자들은 90% 이상으로 상승할 것이다.
2016. 7. 30. 지만원 |
글쓴이 : 지만원 |
지만원이 그린 김대중 초상 (1980. 5월, 김대중 자필 진술조서) 김대중은 80년 5월 17일 체포되어 수사 받는 과정에서 5월 20일과 5월 25일 2차례에 걸쳐 자술서를 썼습니다. 1. 1945년 9월경 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목포지부의 선전부장으로 참가했음. 2. 1945년 9월경 결성된 목포청년동맹에 가입했음. 3.. 1945년 말경에 좌우합작을 기치로 출범한 신민당(당수: 좌익 백남운)에 가입, 목포지부 조직부장을 맡았음. 4. 해방 당시 민주주의니 공산주의니 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 형편이었으므로, 좌익분자와 도 같이 일하게 되고, 공산주의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게 되었음. 5. 1949년 친구의 형이 찾아와 서울 가는 여비를 부탁해 도와주었는데, 후일 그가 좌익활동 혐의로 체포되었음. 6. 6.25때에는 인민군을 피해 본인의 선박에 근무하는 박동련이라는 선장집에 숨어있다가 2 일 만에 발각되어 정치보위부에 체포되었음. 7. 정치보위부에서는 "우리 애국자(공산주의자)를 몇 명 밀고해서 죽였느냐?", "이 새끼가 아직도 반성못했다", "네가 해군과 거드럭거리고 매일 요정 출입할 때 우리가 너를 얼마나 찢어 죽이고 싶었는지 아느냐"는 등 배신자라고 협박했으나 그 이상의 조사 없이 8 월 말경 형무소로 넘어 갔음. 8. 본인은 신병치료차 1972년 10월 11일 일본 도쿄(東京)에 갔다 거기서 유신선포를 맞이 했음. 9. 그 후 미.일 양국을 왕래하면서 기자회견, 강연, 양국 정치인의 접촉, 한민통의 결성 하고, 유신반대와 민주회복 활동을 전개하다 1973년 8월 8일의 납치사건으로 귀국하게 되었음. 10. 1973년 6월부터 해외에서의 반정부 운동을 좀더 조직적이고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 미국 에 한민통 임시 총본부를 두고 그 산하에 미국지부, 일본지부, 캐나다지부를 두고자 모색했 으며, 총본부의장에는 본인이 앉고 미국지부 의장은 안병국 목사, 일본지부 의장에는 김재 화, 캐나다지부 의장에는 이상 목사를 내심 지목하고 있었음. (1980. 7, 국가보안법 위반행위 및 내란음모죄: 사형) 1980. 7. 31일, 검찰은 김대중의 성장 환경, 해방 후의 좌익활동, 한민통의 조직 및 좌익 활동, 폭력시위, 광주사태 선동 및 배후조정에 관해 단죄했습니다. 김대중은 일본에서 한민 통을 결성하여 북한으로부터 자금지원을 받아가면서 좌익활동을 했습니다. 한민통은 "한국 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의 약자입니다. 지금의 민주당도 "국민회의"였습니다. "한민통"은 좌익들로 구성된 조직입니다. 육영수 여사를 저격하고 사살한 문세광이가 한민 통 조직의 일원입니다. 그 직후에 들어왔다가 간첩으로 체포된 김정사도 한민통 조직의 일 원입니다. 이로 인해 대법원은 한민통을 반국가단체로 규정을 했습니다"(988년 11월 18일 국회 광주 사태 진상조사 특별위원회. 신경식 의원) 조총련이 한민통에 매월 1000만 엔 내지 2000만 엔씩 자금을 공급했습니다, 한민통은 좌익 인 광동희가 발행하는 "민족시보"를 기관지로 활용했습니다. 이는 공산당 선전지였습니다. 김대중에 적용된 법조문은 1)형법 제90조 제1항, 제2항, 제 87조 2)계엄법 제15조, 제 13조, 계엄포고령 제1조 제1항 3)국가보안법 제1조 제1호 4)반공법 제5조 제1항 5)외국환 관리법 제35조, 제17조 제1항 6)형법 제37조, 제 38조였습니다. 그의 좌익행각은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습니다. 1. 8․15해방후 신민당(후에 남로당에 합병)과 민주애국청년동맹, 전국노동평의회등 "극렬 좌익정당과 단체"에서 활동했고 "남로당" 목포시 당청년부장으로 공산계 파괴활동의 중추적 분자였다. 이 당시 김대중은 공산독재체제를 위한 적색혁명투쟁에 광분했다. 2. 6․25가 발발, 목포가 공산군 수중에 들어가자 목포시 인민위원회 결성에 참여하여 부역 행위를 관리했다. 3. 특히 남로당 섭외부장 겸 민주주의 민족전선 부위원장 유재식에게 활동자금을 제공한 죄 로 전남도경에 검거됐다. 4. 김대중이 의장인 국민연합이 1980. 5월 22일 개최하기로 예정한 민주화 촉진 집회에서 시 위를 선동하여 폭력으로 국가기관을 장악하려 했다. (핵심죄목 1: 내란음모죄: 15년) 5. 김대중은 1972년 도일하여 정치적 망명을 가장하여 한국을 비난, 국제적으로 고립시키려 했고, "한민통"을 결성하여 반정부 교포들을 규합, 한국정부를 전복시키려했다. 국가보안법 제1조 제1호 위반에 해당하는 반국가단체 구성죄를 저지른 것이다(사형). 6, 동년 8월 귀국, 반국가단체인 한민통 일본본부 구성원들과 통신하면서 10․26 사태로 인 한 정국불안을 틈타 민주회복을 구실로 반정부의식이 강한 복학생 및 재야인사들에게 활동 비를 뿌리며 반정부 조직을 강화했다. 7. 박수부대까지 동원, 강연장 분위기를 고조시키면서 강연 모습과 내용을 담은 비디오 테이 프, 녹음 테이프, 책자까지 제작하여 학원가 및 추종자들에게 배포, 학생 및 일반 국민들에 게 반정부의식을 고취하다가 전남대 복학생 정동년에게 5백만원을 주어 광주사태를 유발시 켰다. (핵심죄목 2: 반국가단체 구성죄, 국가보안법 제1조제1호: 1980년 9월 11일 사형구형) 8. 1981년 1월 23일 대법원이 김대중의 상고를 기각하여 사형이 확정되었습니다. 바로 이날 전두환은 김대중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했으며 미국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직후인 3월 3일 징 역 20년형으로 또 감형했습니다 (1988년 11월 30일 국회청문회에서 밝혀진 사실) 1. "해방 후 1946년까지는 좌익활동을 했고 1947년부터는 완전히 손을 끊었다"(김대중의 말). 2. 1945년 8월 25일 좌익단체인 건국준비위원회 목포시지부에 가입하여 활동한 사실이 있다 (김대중 시인한 사실이라고 검찰이 증언) 3. 목포청년동맹에 가입하여 목포시지부 청년들이 남교동 파출소를 습격한 배후 조종의 혐 의로 구속되었다(김대중 시인한 사실이라고 검찰이 증언) 4. 당시 좌익정당인 신민당(당수 김두봉, 북한 부주석)에 입당하여 조직부장으로 활동한 사 실이 있다(김대중 시인한 사실이라고 검찰이 증언) 5. 1950년 9월 7일 "간첩" 장금성이 남로당 전남 목포시 당위원장 앞으로 제출한 당원등록 청원서에 1946년 6월 16일 김대중씨의 활약상이 나열돼 있다. 여기에는 "민주청년동맹 목포 시지부위원회 간부 김대중이 적극 찬동하고 있다", "민청 간부 김대중에서 교양을 받았다 "는 대목이 있다(김대중 시인한 사실이라고 검찰이 증언) (북에서 받은 돈) 1, 일본에 있는 동안 간헐적으로 좌익인물들로부터 산만하게 수십-수백만엥씩 받았다는 수 사기록은 있으나 이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또한 당사자간에 주고받는 돈은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2. 1997년, 평양에서 김병식 부주석이 김대중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여기에는 김대중이 1971년 20만달러를 김병식으로부터 받은 것으로 확실히 기록돼 있습니다. 3. 1999년 김정일 발언록에는 "DJ가 김일성에게 많은 빚을 지고 총애를 받았다" 요지의 글 이 있습니다(일본 문예춘추 12월호). 4. 일반에게 노출된 것은 언제나 빙산의 일각입니다. 이것 말고도 김대중은 61억엔을 받았다 는 설을 포함해 많은 말들이 돌고 있지만 아직은 이를 수사할 조직이 없습니다. 이는 앞으 로 밝혀져야 할 것입니다. 지금 김대중이 상식을 초월하는 방법으로 북한에 퍼다주는 것은 이 빚을 10배 이상으로 갚으라는 김정일의 요구라고들 하지만 이 역시 심증만 가지 확증은 없습니다.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대통령에 대한 의혹은 그 개연성이 있는 한 공론화돼야 한다는 것이 2002년도의 대법원 판결입니다. 첫째, 김대중은 일본에서 많은 활동을 했습니다. 많은 자금도 사용했을 것입니다. 많은 신세도 졌을 것입니다. 그 중에 북한 돈이 없었다고는 누구 도 말할 수 없습니다. 둘째, 그가 북한으로부터 20만 달러를 받았다는 편지가 있습니다. 그 당시의 20만 달러라면 지금의 수백억원에 해당합니다. 셋째, 김일성으로부터 많은 빚을 졌고 총애를 받았다는 사실이 그가 존경해 마지않는 김정 일로부터 노출됐습니다. 넷째, 그는 쫓기는 사람처럼 북한에 퍼주었습니다, 예를 들면 금강 산 관광객이 가거나 안 가거니 무조건 1년에 50만 명이 간 것으로 하고 1인당 300달러씩 정 산해주는 것은 이에 대한 단적인 증거입니다. 몰래 준 돈도 수십억이라는 소문이 있지만 미 국이 공식적으로 밝혀 준 것은 아직 4억 달러에 불과합니다. 이 네 가지는 그를 의심할 수 있는 충분한 개연성을 제공합니다. 김일성과 좌익들로부터 얼마나 많은 자금을 받았는가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닌 것 같습니 다. 문제는 그가 좌익으로 정치 일생을 출발했고, 좌익들과 조직을 만들었으며, 좌익들과 꾸 준히 연대해왔고, 지금도 좌익활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적장인 김정일 찬양) 1. "김정일은 식견 있고 합리적인 판단능력을 가진 지도자"라고 평가했습니다. (2000년) 1) "김정일 총비서는 지도자로서의 판단력과 식견 등을 상당히 갖추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 다". (2000년 2월9일 도쿄방송) 2) "김정일 총비서는 실용주의자라고 생각한다". (2000. 2.28. 독일 슈피겔지) 2. 2000년, 제3차 ASSEM회의를 김정일 외교장으로 활용했습니다. 대통령의 직분을 망각하 고 김정일 영업부장을 자처했습니다. 그는 유럽국가들을 상대로 북한과 수교하라고 종용했 습니다. 3. 많은 돈을 뿌리면서 미국 대통령을 만나러 갔으면 로버트 김을 석방해달라는 말을 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김정일 식견있는 지도자입니다. 국제금융을 동원하여 북한을 도와줍시 다"하다가 THIS MAN의 경멸적인 호칭을 얻고 힘이 빠져 돌아왔습니다. (적장과의 내통행위) 1. 김대중은 김정일로부터 동지적 사랑도 받고 깊은 은혜도 입었다 합니다. 일본잡지 문예춘추 2000년 12월호에 실린 김정일의 육성녹음입니다. 중요한 것만 발췌합니 다. "지금 정권을 쥐고있는 김대중은 야당 시절을 아득히 먼 옛날처럼 잊어버리고 미제의 등에 업혀 반사회주의 책동에 음양으로 혈안이 돼있다". "김일성 수령님은 김대중이 민족주의자이면서 동시에 애국주의자라고 말씀하셨다. 이런 말 씀에 그리고 수령님의 사랑과 배려, 동지적 신뢰에 대해 오늘의 김대중은 배신으로 대답하 고 있다". "김대중은 야당 시절 민주화를 외치며 우리들에게 접근했으면서도 신뢰와 의리를 버리고 반 사회주의․반통일 책동에 광분하고 있다". "김대중을 두목으로 하는 남조선 당국자는 동포와 민족을 위한다는 구실로 ꡐ태양정책ꡑ을 실시하고 있으나 사실은 우리 공화국을 혼란시키려는 기만정책에 불과하다"(1999.2월). "그도 한때는 민족자주와 미군철수를 주장, 민족주의자임을 자칭했으나 민족의 존엄과 양심 을 저버리고 악랄한 친미․친일의 사대매국 행위에 열을 올리고 있다"(1999.11월). 2. 김정일의 추가적인 폭로가 무서워서인지 김대중은 200.3월에 베를린 선언을 기획하여 김 정일에 접선해 줄 것을 암시하는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드디어 2000년 6.13 및 6.15일 90분 간의 단 둘이 차 속에서 밀담을 나누었습니다. 일생동안 색깔로 의심받은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으면 대북 관계에서 만이라도 투명해야 했습니다. 북한에 가서 김정일과 단 둘이 갈 때 에 40분 올 때에 50분간 일행을 이탈해 따로 밀담을 갖는 것은 의심받아야 마땅합니다. 남 북한 관계의 특성과 그의 색깔론에 비추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3. 국민과 국회의 동의도 없이 김정일과 연방제 통일안에 합의 서명했습니다. 초법행위요 국가보안법 위반입니다. 3. "김정일이 주한미군 주둔을 인정했다"고 말했습니다. 전쟁은 없다는 것을 설득하기 위해 지어낸 거짓말이었습니다. 4. 북한의 사상 최대의 전력증강과 훈련 사실을 국민에게 속이려 했습니다. "2000년의 전력 증강은 과거 5년 치에 해당한다", "지난해의 훈련은 10년이래 최대 규모였다"는 연합사령관 의 보고내용은 쉬쉬하고 감췄습니다. 한국군의 군사훈련을 모두 축소 생략했습니다. 2001년 에 대대적으로 수백억원의 예산을 들여 준비한 6.25행사도 못하게 했습니다. 5. 북한의 적화통일 행사에 많은 이적단체들을 여러 차례 보내 김정일에 충성을 보였고, 저 들의 적화통일에 동조한다는 의지를 보였습니다. 6. 2001. 2월, 미국방문 전, DJ는 평화선언을 획책했다가 부시에게 저지당했습니다. 1973년 월맹의 레둑토와 키신저가 파리에서 평화협정을 맞고 노벨상을 탔습니다. 2년후인 1975년 월맹은 순식간에 월남을 삼켜버렸습니다. 800 - 1,200 만이 재교육 캠프에서 이슬로 사라졌 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이슬"로 사라질 뻔했습니다. 7. 지난 2월 김정일 방문이 임박하다며 갑자기 중령급 이상 20%를 삭감시키라고 했습니다. 반 DJ세력을 제거하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반공전선 와해) 1. 국가통수권자로 전쟁은 없다고 선포한 것은 군.민의 안보정신을 허무는 이적행위였습니 다. 2. 적을 의심해야할 위치에 있는 군 최고 통수권자가 적을 의심하지 않으면 내통자로 의심 받아야 합니다. 3. 북한은 주적이 아니라 감싸야 할 민족이라고 주장했습니다. 4. 스스로 주한미군 지위변경, 보안법 개정 또는 철폐를 주장하여 지하에서 활동하던 좌익들 에게 면죄부를 주어 공공연히 활동하도록 격려했습니다. 5. 임동원, 한완상, 이태복 등을 포함한 좌익용공 인사들을 대거 기용하고 있습니다. 6. 46개 언론사 사장단을 북에 보내 김정일의 술자리 매너에 홀리도록 하고 그 언론사 사장 들이 국내에서 김정일 찬양론을 펴게 했습니다. 7. 국정원으로하여금 사회단체를 초청해 김정일 초호화판 생일잔치 비디오를 보여주고 김정 일이 식견있는 지도자이며 매우 합리적인 지도자라고 선전하게 했습니다. 8. 국정원으로 하여금 언론 및 사회단체 간부를 데려다가 전쟁은 없다고 교육했습니다. "110 만 대군은 남침용이 아니라 일자리가 없어서 붙들어 둔 것이다". "서부전선에 콘크리트 장 애물과 지뢰를 설치한 것은 옛날 장군이 바보였기 때문이다", "고속도로와 철로는 방어하는 우리에게 더 유리하다"는 식의 교육을 했습니다. 모두를 뒤집어서 교육했습니다. 많은 언론 사 간부들이 교육내용을 그대로 믿고 있습니다. 9. 초등학교 교과서에 김정일 사진을 실었습니다. 학생의대부분, 초등학생의 90% 이상이 김 정일을 멋있는 장군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10. 전교조의 좌익 용공 교육을 조장하고 있습니다. (남침 통로 열기) 1. 2000년12월까지 지뢰를 제거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열흘 묵던 나그네 하루가 급한 식으로 제거 명령을 내렸습니다. 아마도 그럴만한 일정이 잡혀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2. 타당성 분석과정 없이 경의선을 환상의 실크로드라고 거짓말을 하면서 남침용으로 사용 될 수 있는 남측 길만 열어주었습니다. 북으로 가는 통로는 지금도 막혀 있습니다. 3. 2001.6월, 북한에 제주해협 통항권을 주자고 있고, NLL도 개방하며, NLL일부를 북한에 떼어내 줄 것을 시사했습니다. 4. 연천의 제5땅굴을 조사해보지도 않고 "천연동굴"이라고 못박았습니다. (한국군의 손발 묶기) 1. 현장지휘관에게 부여된 "UNC 자동교전규칙"을 박탈하여 "먼저 쏘지 마라", "청와대에 먼 저 보고하라"며 군의 손발을 묶었습니다. (적장에 군자금 대주기) 1. 러시아에서 받은 돈 14억7천만 달러를 안 받을 테니 그 대신 러시아가 북한에서 받을 돈 50억 달러를 받지 말라는 거래를 했습니다. 2. 알게 준 돈은 5조 규모입니다. 3. 모르게 준 돈은 누구도 모릅니다. 단지 미국이 그 일부를 폭로해 주었습니다. 2000년도 한 해에 4억 달러를 김정일에게 비밀로 주었다는 내용입니다. 미의회 조사국(CRS)은 2002. 2. 25, 의회에 한.미 관계 보고서ꡑ에서 미CIA와 주한미군 사령부가 파악하고 있는 내용을 밝혔습니다. "정부는 1999년과 2000년 어느 날까지 현대를 통해 "비밀리"에 4억달러를 북한 에 주었다. 관광대금 4억 달러도 주었다. 총 8억 달러가 갔다. 그 중 4억 달러를 무기 구입 에 사용했다"는 요지였습니다. CIA는 2001년1월 이 내용을 한국정부에 경고했지만 한국정부 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다러주기를 강행했다 합니다. 여기에 더해 김대중 정부는 미국에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빼달라고 강력히 요구했습니다"(2002. 3. 27 일간지들) 4. 업체들에게 북한 투자 및 지원을 강요하고, 대북지원에 나서는 업체에 세무조사를 면제해 주었습니다. 5. 2년전에 환했던 평양시내가 지금은 깜깜하답니다. 전기가 무기제조 및 땅굴 굴착에 사용 됐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김대중은 북한에 경수로 용량과 맞먹는 50만 KW의 전기를 공급 하려다 미국에 의해 제지당했습니다. 6.. 금강산 사업으로 퍼준 돈, 비밀리에 상납한 돈, 앞으로 임동원이 북한에 약속할 돈 이외 에도 정부가 직접 또는 간접으로 북에 지원한 돈은 쌀, 비료, 투자비 등이 2조 4천억입니다. 필자의 조사로는 현 정부에 들어 이제까지 북한에 퍼 준 돈이 다음과 같이 집계됐습니다. 1) 2000.9.28: 60만 톤(3,120억원) 2) 6회에 걸쳐 104만톤(4,660억원) 3) 정부가 사용한 남북 협력기금: 1조864억원 4) 1999년 한해 동안 대기업들이 부담한 준조세: 업체 당 평균 745억 원. 이는 기업들이 부담한 국세의 1.2배이며 지방세의 20배 규모에 해당하는 엄청난 액수다. 5) 99년10월6일 현대가 20인치 칼라 TV 3만대를 북송(445만 달러: 58억원) 6) 99년8월16일 대한제당이 연간 2만톤(60만 달러)씩 북한에 제공(31억원) 7) 99년11월27일 삼성이 172만 달러를 투자(22억원) 8) 2000년 1월 25일 현대아산이 190만 달러 상당의 기와공장 설비 반출(25억원) 9) 2000년2월 8,863평 짜리 평양실내 체육관 준공(450억원) 10) 평화자동차 공장에 금강산 국제그룹이 3억 달러 투입(4,000억원) 11) 2000년 3월7일 삼성전자가 평양체육관용 전광판 시스템에 400만 달러를 투자(52억원). 12)2000년3월22일 삼성이 조선컴퓨터 소프트웨어 지원에 73만 달러를 부담(10억원) 13) 내복 1,000만벌(600억원) 14) 2000년 3월6일 축협에서 계란 1천만 개, 새마을운동에서 곡물 1,660톤을 보냈다. 15) 2000년 4.12일 평화의 숲에서 묘목 20만 그루. 총계 2조3,892억 원이다. 7. 앞으로 더 가는 돈(2000년 당시) 1) 5월 중순부터 비무장지대(DMZ) 내 경의선 공사를 시작해 10월 이전에 연결을 완료하 고, 5월 중 금강산 육로관광을 위한 임시도로 연결 공사에 착수한다 합니다. 군사분계선-개 성 12㎞ 구간 공사에 필요한 레일, 침목 등 기자재를 북측에 지원하겠다 합니다(2002,4.23 한국일보). 2) 군사분계선에서 강릉을 잇는 동해북부선 남쪽 구간(127km) 공사를 올해 안에 시작해 2009 년께 완공한다 합니다(한겨레, 문화일보 2002. 4. 22). 3) 4월말에 비료 20만 톤을 보낸다 합니다(한겨레 2002.04.12) 4) 6월부터 3개월에 걸쳐 북에 쌀 50만톤을 수송한다 합니다(세계일보 2002.4.24). (반공 역사 말살하기) 1. 2000년10월1일, 이어서 6.25를 "실패한 통일 노력"으로 정의했습니다. 2. 어이없게도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베트남 대통령에게 한국군 파병에 대해 사과했습니다. 월남전을 민족해방전쟁으로 본 것입니다. 2001. 8. 23일, DJ가 천득렁 베트남 주석 환영만찬 에서 ꡒ우리가 불행한 베트남전에 참여해 본의 아니게 베트남 국민들에 고통을 준 점을 미 안하게 생각한다ꡓ며 "사과"를 한 것입니다. 이는 단순한 망발이 아니라 한겨레 21의 "아! 몸서리 처지는 주월한국군의 양민학살"론과 맥을 같이 하는 색깔 있는 발언이었습니다. 한 겨레 21. 강정구, 한홍구 같은 사람들은 베트남전을 민족해방전쟁으로 보고, 월맹군을 민족 해방군, 미군/한국군을 반역군으로 몰아 부치고 있습니다. 영문으로 번역하여 세계 각국에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만행"을 고발하고 있다. 여기에 김대중이 가세한 것입니다. 3. 여수-순천, 4.3 반란사건을 일으켜 방화 살인한 좌익들을 통일의 역군으로 둔갑시켰습니 다. 4. 13년전, 7명의 경관을 죽이고 11명의 전경에게 주상을 입힌 동의대 좌익 데모학생을 민주 화투사로 명예회복시켰습니다. 5. 13년전, 과격한 불법노동운동으로 실형을 받은 전교조 교사 1,139명에을 민주화투사로 둔 갑시켰습니다. 6. 좌익 대모를 민주화투사로 둔갑시켜 최고 2억까지 보상합니다. 반면 국가의 부름을 받고 나가 싸운 고엽제 환자들과 전상자들은 약값조차 제대로 대주지 않고 있습니다. 6. 법원이 반국가단체로 판결한 한총련에까지 명예회복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7. 과거의 사법부 재판의 권위를 몇 명의 수상한 무명인물들이 "민주화명예회복 및 보상위 원회"를 만들어 짓밟고 있습니다. 과거의 사법부가 현재의 "민간심의위원회"보다 못한 것입 니다. 과거의 정통성을 모조리 부정하고 공산주의 통일정권을 세우려 하는 것입니다. 9. 애써 잡은 63명 간첩은 영웅 취급해서 보내주고, 국군포로, 강제 납북자는 쥐어박고 입을 막습니다. 10. KAL기 폭파범 김현희는 극진히 대접하고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115명의 유족은 홀대하 고 학대합니다. 11. 국군 포로를 이산가족으로 전락시키고 있습니다. 12. 좌경 데모는 보호하고, 보수 데모는 차단합니다. 13. 국정원, 기무사, 경찰의 간첩 잡는 활동을 은밀히 차단합니다. (언론의 입막기) 1. 46개 언론사들을 북한에 보내 북한의 명예를 손상하는 글을 쓰지 않기로 합의케 했습니 다 2. 언론사들에게 "햇볕정책"에 악영향을 주는 글을 쓰지 못하도록 합의케 했습니다. 3. 언론사 죽이기를 자행했습니다. 특히 김정일이 가장 싫어하는 조선과 동아를 죽이려 했습 니다. 국세청 800명 인력의 半인 400명을 풀어 60-90일간 세무조사를 폈습니다. 서울방송에 51명, 조선일보에 50명, 동아일보에 35명, 중앙일보에 24명이었습니다. 여기에 공정거래위원 회도 가담했습니다. 한마디로 쑥대밭을 만들어 언론을 잠재우겠다는 의도였습니다. 국가가 도둑을 맞아도 짖는 개가 한 마리도 없게 만들려 한 것입니다. 어록을 보면 김대중은 천하의 사기꾼입니다 그는 희대의 사기꾼입니다. 이런 사기꾼은 무슨 짓이든 저지를 수 있습니다. 국가체면과 국 민자존심 위해서라도 이런 사기꾼은 끌어내려야 합니다. 그의 사기 행각을 보십시오. 1)"이 김대중은 돈을 돌보듯 합니다"(1967) "여러분 내 눈을 똑바로 보세요. 내 얼굴을 똑똑히 보십시오. 나는 내 장래에 대해서 큰 포 부가 있습니다. 나는 돈 몇 푼 받아 가지고 내 장래를 망칠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내 꿈이 너무도 크기 때문에 더러운 돈 같은 것은 아무리 고통스럽고 괴로워도 안중에 없다는 것을 명백히 해둡니다" (1967년 6월 4일 오후 2시 목포역전 광장에서 행한 DJ의 국회의원 선거 유세). 2) "이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면 우리 가족은 무재산 가족이 될 것입니다"(1997) "저희는 이번에도 저희자식들 재산까지 다 공개했는데 앞으로 대통령이 되면 자식뿐 아니 라형제의 재산까지도 공개를 하고 이렇게 해서 정말 무소유가 되겠습니다. 정말로 내 자식 들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이지만 우리 가족은 무재산 가족이 될 것입니다. 돈은 먹고 살 만큼 만 있으면 됩니다. 이번에 영등포의 땅과 경기도 수원의 땅은 장애인을 위해 내놓았고요 저 희 집 현재 살고 있는 것도 가족회의에서 이미 결정이 났습니다". (1997. 10. 8일 관훈클럽) 3) "국민 여러분, 이 김대중은 이제 고개를 들 수 없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제 가족들이 모두 도둑질을 했습니다. 고개를 들 수 없습니다"(2002.6) "저는 지금 고개를 들 수 없는 참담한 심정으로 국민 여러분 앞에 섰습니다ꡓꡒ국민 여러 분의 성원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저는 자식들이나 주변의 일로 걱정을 끼치는 일이 없 도록 하겠다고 여러 차례 약속드렸으나 결국 저는 국민 여러분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 했습 니다ꡓ. (2002.6.21 일간지 일동) 4) 2002.07.10, ꡒ국민 여러분께 한없는 죄송함을 금할 길 없습니다ꡓ(2002.7) 김대중씨가 박선숙 대변인을 통해 차남 홍업씨가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상 알선수재, 조세 포탈 및 변호사법 위반 혐의로 구속 기소되고 홍업씨 관련 의혹에 대한 검찰수사 결과가 발 표된데 대해 한 말입니다. 검찰은 홍업씨가 기업들로부터 48억을 받았다고 공소했습니다. 현대에서 16억, 삼성에서도 5억을 받았고, 이 2개 업체들로부터 매달 5천만원을 받았다 합니다. 임동원한테서도 때때로 2,500만원, 신건 한테서도 1,000만원씩의 상납을 받았다 합니다(2002.7.11 조선, 중앙). 홍업씨는 10억원을 아파트 베란다 창고 안에 숨겨 놓고 그 앞에 가구를 쌓아 놓고 지냈다 합니다. 그러면서도 아버지를 닮아 "부정한 돈은 한 푼도 받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해왔습 니다. 이런 사실은 빙산의 일각입니다. 홍업이가 검찰에 숨긴 사실, 검찰이 또 점수 따려고 감싸 준 사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더구나 대통령과 국무총리가 나서서 송정호 법무장관에게 수 사를 중단하라는 압력을 넣었는데도 이 정도가 불거져 나왔습니다. 6.11일 오전, 국무회의 가 끝난 직후 이한동 총리가 법무장관에게 했다는 말을 소개합니다. "어른이 매우 섭섭해하십니다. 어떻게 한 집안에서 두 자식을 구속할 수 있느냐고 하시더 군요. 불구속 수사는 도저히 안 되는 건가요?" 5) "이 김대중은 일생동안 거짓말이라고는 해 본적 없습니다"(1997). "저는 일생에 거짓말한 일이 없습니다.(청중들 폭소) 저는 거짓말한 일이 없어요. 이것은 약속을 못 지킨 것이지 거짓말 한 것은 아닙니다. 거짓말한 것하고 약속했다가 못 지킨 것 하고는 다릅니다". (1997. 10. 8일 관훈클럽) 6) "이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면 청와대가 국정을 농단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입 니다"(1997). "하나 첨부하면 제가 집권하게 되면 청와대 비서실을 대폭 축소해서 그것을 문자 그대로 비 서실로 만들고 모든 국정은 국무위원들과 협의해서 하겠습니다. 지금 보면 이 나라에서는 청와대 비서관 회의가 국정을 좌지우지하고 국무회의라는 것은 있으나마나 해요. 청와대에 서 국민이나 누구에 대해서도 책임을 안지는 청와대 수석 비서관이 장관에게 전화 한 통 하 면 쩔쩔매고 그대로 따라가야 해요. 이건 이 나라 헌법 질서가 잘못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점도 앞으로 시정할 것이기 때문에 비서들 자신들이 정치를 농단하는 일은 저희 집권 하에서는 없을 것이다, 이것도 말씀드리겠습니다". (1997. 10. 8일 관훈클럽) 7) "이 김대중이가 노벨평화상을 받으면 상금을 국가에 내놓겠습니다"(2000), "노벨평화상은 한국국민 모두의 업적으로 받은 상이니 만큼 저는 상금(11억2,222만원)을 노벨상 취지에 맞게 사용하겠습니다". (중앙일보 2000.12.11) 8) "노벨평화상 상금은 이 김대중의 것입니다"(2001) "노벨 평화상 상금은 아태재단에 넣어두었다". (2001. 12.10 조선일보). 9) "노벨평화상금을 김정일에 바치려 합니다"(2002). "노벨상금과 그 이자를 평양과학기술대학에 기탁할 것이다. 그들은 6.15 기념관을 지을 것 이다". (2002.5.20 중알일보, 세계일보, 신동아 2002.6월호) 10) "김정일은 나쁜 놈입니다"(1997). "저는 김정일을 대단히 위험한 사람으로 보고 있습니다. 오만하고 독선적이고 호전적인 사 람, 어렸을 때부터 안하무인으로 컸고 71년부터 막강한 권력을 장악해 왔고 그래서 대단히 위험한 사람이다. 따라서 우리가 정말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은 이런 위험한 사람을 다루는 데 있어서 정말 슬기롭고 지혜로운 자세가 필요하다. 저는 김정일에 대해서 조금도 방심하 지 않습니다". (1997.10.8 관훈클럽) 11) "김정일은 식견 있고 합리적인 판단능력을 가진 지도자입니다"(2000년) "김정일 총비서는 지도자로서의 판단력과 식견 등을 상당히 갖추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 다". (2000년 2월9일 도쿄방송) "김정일 총비서는 실용주의자라고 생각한다". (2000. 2.28. 독일 슈피겔지) 12) "김정일과 담판하여 노동당 규약을 개정시키겠습니다"(1997). "저는 집권하면 북한에 대해서 분명히 따질 것 따지고 짚을 것 짚고 그래가지고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 남북정상회담을 하겠습니다. 그 가장 전제조건이 노동당 규약을 개정해서 그러한 자세를 우리가 분명히 믿을 수 있게 바꿔야 합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노동당 규약은 북한에 있어서 헌법 이상이기 때문에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1997. 10. 8일 관훈클럽) 13) "김정일에 군자금을 대주었습니다"(2002). 그는 김정일에 알게 모르게 현금과 쌀로 군자금을 대주었습니다. 5조원 규모입니다. 그는 일 본에 있을 때부터 김일성으로부터 많은 정치자금을 받았습니다. 김정일이 입을 열면 그의 운명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김정일은 그가 물러나기 전에 그를 최대한으로 이용할 것입니 다. 노벨상을 받으면서도 그는 김정일의 눈치를 살폈습니다. 김정일과 함께 상을 받지 못해 죄를 지은 기분이리고 말했습니다. 14) 1980.3.26일 김대중의 YWCA 초청 연설문입니다. 그의 사기성이 잘 나타나 있는 연설문입니다. 나는 내 일생의 교훈으로써,「어떤 경우에도 국민을 배반하지 말고 어떠한 고난이 있더라 도 국민의 편에 서라」는 것, 이것이 내 인생과 정치의 신조입니다. 우리 집 가훈이 세 가지 있는데 그 중 첫째가「하느님과 국민에게 충실하라」입니다. 둘째 는「자기 운명은 자기가 개척해야 된다」이며, 셋째는「절대로 부자가 되지 마라」는 것입 니다(박수, 옳소! 환호). 나는 내 자식들에게 말하기를「돈과 하느님은 같이 섬길 수가 없고, 돈과 양심을 같이 섬 길 수가 없다. 돈은 먹고사는 데 부족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그 이상의 부를 가지게 되면 부의 노예가 되고, 친구들로부터 멀어지고, 국민으로부터 격리되고, 그리고 교만해지고 타락 한다. 따라서 만일 너희들이 경제계에 나가서 사장이 되고 회장이 되는 등등 경영자가 되는 것은 좋지만, 만일 부자가 되면 아버지와 너희들과는 관계가 끊어진다」는 것을 나는 얘기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나는 국민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을 정치인으로서의 최대의 기본으로 생각하고 있 기 때문에 "나는 무엇이 되기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대통령은 둘째, 셋째입니다. 나 는 무엇이 되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국민과 내 양심에 충실하기 위해서 사는 사람입니 다. 내 양심에 충실하다가 기회가 있어서 대통령을 맡게 되면 봉사할 것입니다(박수, 환호). 그러나 국민과 양심을 버리고「무슨 수단을 쓰든지 대통령이 되겠다」는 것, 이것은 내가 죽으면 죽었지 추구할 수 없는 길입니다.(옳소! 박수) 여러분에게 솔직히 얘기한다면, 나는 다음 정권, 그렇게 대단한 매력이 없습니다. 왜? 첫째, 경제만 보더라도 박정희씨가 아주 망쳐 놓았습니다(박수. 옳소! 환호). 이것을 맡아 놓고 수습한다는 것은 마치 다 파먹은 김칫 독에다 머리를 집어넣는 것과 마 찬가지입니다(옳소! 박수). 4년 동안 뒷치닥거리나 하고 나면, 그것도 내가 좋아하지 않는 사람 뒷치닥거리를 하고 나면 4년은 끝나는 것입니다(웃음, 박수). 남북문제, 노동문제, 청년․학생문제, 군대를 통솔하는 문제 등등 다음 대통령의 짐이 여간 무겁지가 않습니다. 따라서 내 개인적인 생각을 하면,「누가 한 4년쯤 해서 실컷 고생하고 난 뒤 그때쯤 내가 맡는 게 차라리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박수, 환호) 여러분! 나는 아직도 이와 같이 여러 가지 여기서 공개할 수 없는, 그 동안 많은 치욕과 고 통과 괴로움을 당했지만 그러나 나는 믿습니다. 나를 바닷 속에 상어밥이 되게 던지려고 할 때도,「내가 여기서 죽더라도 국민은 나를 잊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했으며, 내가 법정에 섰을 때도 판사를 향해, 검사를 향해,『당신들이 나를 지금 재판하지만 역사와 국민은 내 편』이라는 것을 얘기했습니다(옳소! 박수). 누구에게 천대를 받건, 누구에게 멸시를 받건, 누구에게 박해를 받건, 아니 오늘 생명을 잃 건, 내 국민만 나를 버리지 않고, 내 국민만 나와 같이 있고, 내가 내 국민을 위해서 봉사할 수 있는 한은, 김대중에겐 불행이 없고 김대중에겐 슬픔이 없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말씀드 립니다(박수, 옳소!) 따라서, 나는 지금 게딱지같은 국민주택에 살고 있지만(웃음), 국민을 배반하면서 부를 얻 는 것보다는 하느님과 우리 국민을 택했습니다. 국민을 배반하면서 안전을 택하라고 한다면,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습니다. 이 신념은 내가 죽는 그 날까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박수). 여러분! 나는 기독교 신자이기 때문에, 예수의 제자입니다. 예수는 내 스승입니다. 나는 하 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예수는 나의 형님입니다. 나는 그의 제자이기 때문에 스승의 말씀 을 따라야 합니다. 여러분! 나의 스승 예수는 우리에게 이와 같이 우리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을 위해 모든 것을 헌신하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내가 국민의 편에 서서 국민의 자유와 권 리와 행복을 위해 싸운 것은, 예수를 믿는 사람으로서 당연한 의무라는 것을 여러분에게 말 씀드립니다(박수). 북한은 한쪽으로는 대화를 하면서도 간첩선을 내려보냅니다. 폭력과 무력을 통해서 남한을 뒤집어엎겠다는 소위「남조선 해방전략」을 포기하지 않는 한, 우리는 국가의 안보와 반공 의 태세를 조금도 늦출 수가 없다는 것을 나는 여러분에게 강조합니다(박수, 옳소!). 나는 반공주의자입니다. 그러나 국민에게 넘치는 자유와 정의와 안정을 줌으로써 국민들이 이 땅에 정을 붙이고, 대한민국에 사는 것을 기쁨으로 생각하고, 자발적으로 이 나라를 지키 려고 하는, 공산당 침투의 여지가 없는 반공과 안보를 주장하는 것이 나의 정책이요 박정희 씨와 다른 점인 것입니다(박수). 국민이 있는 곳에, 여러분이 있는 곳에, 김대중이가 있습니다. 국민이 필요로 하는 데 김대 중이는 있습니다. 김대중이는 천 번 죽어도 국민을 떠나지 않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필요로 하면, 우리 민족의 혼이 내게 명령하면, 나는 다시 열 번 납치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백 번 감옥에 가는 한이 있더라도, 천 번 연금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여러분에게 봉사할 것 을 다짐합니다!(옳소! 환호, 박수) (연설 끝) 경향신문이 보도한 김대중 1980.5.18일자 경향신문도 이날 '선동․권모술수로 얼룩진 위선의 화신 김대중을 벗긴다'라 는 제목과 '공판과정에서 드러난 출생서 친북괴 활동까지'란 제목을 단 특집기사로 김대중 을 비난했다. 아래는 경향신문 기사를 요약한 것입니다. (김대중의 출신 배경) 김대중, 그는 어떤 인물인가. 달변과 간교한 지략을 내세워 한국의 케네디라는 허상 속에 철저히 가려졌던 그의 참모습은 어떤 것일까.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마키아벨리즘의 화신」바로 그것이었다. 말 과 행동이 다르고 이중 인격과 위선에 가득 찬 그의 인생경로는 급기야 자신을 환상적 사이 비 지도자로 착각토록 하는 망상증에 사로잡히게 했던 것이다. 출생에서부터 정치활동에 이르기까지 공판과정에서 드러난 김대중의 실상을 벗겨본다. 출 생과 성장 金김대중의 생모 장오도 여인(71년5월9일 사망)은 1911년 제강성조와 결혼했다가 사별, 1920년에 윤창언의 셋째 첩으로 입적했으나 역시 사별했다. 그후 본남편 제갈성조의 친형인 시숙 제갈성복의 도움으로 주점을 경영하다가 김대중을 임 신, 전남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에 사는 김운식의 첩으로 들어갔다. 1924년 11월 16일 전남 신안군 하의도에서 이 같은 복잡한 계보 속에서 태어난 김대중은 김 운식의 서자로 자라면서 국민학교와 목포상업을 졸업한 후 어업을 시작했고 그후 해운업에 종사했다. 복잡한 가정환경 속에서 자란 아이들의 심성이 그렇듯이 김대중도 극히 반항적이고 교활한 성품이 길러졌고 심지어 의부 김운식을 부친으로 여기지도 않았다. 훨씬 후의 일이지만 1960년에는 서자로 국회의원에 출마하는 것이 불리함을 알고 4남매를 거느리고 있는 의부 김운식과 그의 본처 김순례에게 호적상 이혼을 강요한 다음 그의 생모 장여인을 본처로 입적시켜 자신을 김운식의 차남으로 조작해 강원도 인제군 북면 원통리로 분가, 전적했었다. (김대중의 사생활) 1959년 6월 金은 강원도 인제 지구에서 국회의원에 출마, 낙선하자 빚을 지고 생활고에 허 덕였다. 이때 김대중의 전처 차용수는 빚에 시달리고 계까지 깨져 음독 자살했다. 김대중은 그후 62년 10월 현재의 부인 이희호씨와 중매로 결혼했다. 김대중은 국회의원시 절에 처 이씨를 자신의 비서관으로 등록, 해외여행에 동반하기도 했다. 김대중은 1945년 8․15해방 후 근무하던 일본인 해운회사를 인수해서 사업에 뛰어들었다. 해방 당시 일본인 소유의 회사, 토지, 주택 등 여러 형태의 재산은 적산(敵産)이라 하여 미 군정청이 인수했고 1948년 대한민국 건국 후 국유재산이 되었다. 이른바 '적산불하' 로 출발 한 한국의 기업은 많았다. 김대중이 어떠한 과정으로 일본인 기업을 인수했고 정계에 입문하면서 처분했는지, 김대중 은 1980년 계엄사에 제출한 자술서에 간단하게 기술하고 있다(자료집 참조). 1980년 한국에 체류하면서 김대중을 집중적으로 취재한 일본의 시바다 미노루(柴田穗) 기자 는 김대중의 회사 처분에 대해 위 경향신문의 기사와 같은 설명을 하고 있다. 이래는 시바 다 미노루,『김대중의 좌절』산께이 신문(1982) 기사다. "김대중씨가 급히 강원도로 피신을 하게 된 것은 해운회사의 부사장 나상수가 김대중씨를 횡령으로 고발했기 때문에 그는 급거 강원도로 몸을 숨긴 것이다. 당시, 군통제지역에서 행 정지구로 막 편입됐을 뿐인 강원도 인제 지구는 김대중씨가 잠적할 장소로서 가장 적당했 다. 김대중씨가 59년 선거직전이 아니라 56년에 강원도로 옮긴 사실과, 56년까지의 사이에 횡령이 있었다는 사실은 시기적으로 꼭 맞아떨어진다". "김대중씨가 민주당에 입당한 것, 그 직후에 카톨릭 세례를 받은 것, 강원도로 옮겨간 것은 모두 56년에 일어났다. 그렇다고 하면 국회의원이 되기 위해서는 세례도, 횡령도 태연하게 한다는, 김대중씨의 수단을 가리지 않는 술책을 보여주는 것이다". "59년 6월의 국회의원 선거에서 인제 지구에 출마, 낙선한 직후 새로운 횡령사건이 발각된 다. 선거기간 중 투개표 입회원이었던 문수룡(文壽龍)이라는 사람이 돌연 급사했다. 민주당 에서는 문수룡을 순직으로서 처우하고, 조의금을 보내게 되었다". "당 중앙간부가 조의금 30만원을 모아 김대중씨를 통해 유족에게 건네주도록 했다. 그런데 김대중씨가 이중 12만원만을 유족에게 건넸을 뿐 나머지 18만원을 착복해 버렸다. 이 사실 을 안 당시 민주당원 김재동, 백응기 등 네 명이 김대중씨의 파렴치한 횡령행위를 비난하고 민주당에서 탈당해 버렸다". "김대중씨의 조의금 착복사실이 널리 당내에 전해지자, 당내는 물론 선거구 전체의 비난이 집중됐다. 그래서 궁지에 몰린 김대중씨는 반대로 탈당한 김재동, 백응기 등 네 명을 명예훼 손으로 고발하는 행동으로 나왔다. 고발당한 네 명은 김대중씨를 횡령과 무고(허위신고)로 대항, 고소하는 사태로까지 발전했다. 그러나 사건은 유야무야로 끝난 듯하다" "61년 7월부터 김대중씨는 민주당의 대변인이 된다. 그런데 선전부장 시절에도 횡령 사건이 있었다. 선전부장으로서 학원공작을 구실로 조달한 선거 자금 3천 7백만원 중 7백 70만원을 횡령한 혐의로 구속되어 검찰에 송치됐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김대중의 모략 질) 1960년 7월29일 4․19혁명으로 실시된 국회의원 선거에서 김대중은 강원도 인제군에서 민 주당 후보로 출마했다. 이 선거에서는 7명의 후보가 난립, 4․19혁명으로 쓰러진 자유당의 이름을 내걸고 선전한 전형산씨가 김대중을 누르고 당선됐다. 이렇게 되자 김대중은 4백 명의 데모대를 조직, 군청개표소에 난입, 투표한 22개중 15개를 강탈한 후 전씨의 사퇴를 강요하는 연좌데모를 벌이게 했었다. 드디어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전씨는 김대중에게 사퇴를 약속했지만 법적인 효력이 없어 전 씨의 당선은 보장됐다. 그후 민주당 정권이 전씨를 공민권제한 대상자로 만들어 의원자격을 박탈하자 김대중은 61 년 5월의 보궐선거에서 일방적으로 당선됐다. 이밖에 김대중이 각종선거전에서 저지른 폭력 및 흑색선거운동을 보면- ▲자신의 선거참모를 자파 당원으로 하여금 구타하고 상대당원이 테러를 했다고 역선전했으 며 ▲목포시 만호동 상가주택을 철거한다는 낭설을 퍼뜨려 자기선거운동원을 측량기사로 위장, 주민의 불안감과 반감을 유발케 했고 ▲자신의 선거운동원에게 상대방의 완장을 두르게 하고 고무신을 배급, 유권자의 반감을 불 러일으켰고 ▲상대당원을 가장하여 유권자들에게 회식이 있다고 초청하는 허위선전을 해 상대방후보에 대한 반감과 불신감을 갖게 했으며 ▲김대중의 사인을 받아오는 자에게는 돈을 주게 하여 자신의 인기를 조작했다. 1971년 대통령후보로 출마했을 때 그는 단순한 자동차사고를 여당 측의 암살음모라고 떠들 어대 큰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었다. 그러나 사실은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오던 중 운전사의 운전부주의로 김대중이 탄 승용차가 전복된 것이 조사결과 밝혀져 자동차 사고의 암살음모 주장은 결국 김대중이 조작한 혐의가 짙다는 것으로 끝났다. * 김대중의 집안에 폭발물을 설치한 세칭 폭발물 자해사건도 발생했다. 이는 대통령후보인 김대중의 집 앞에 폭발물을 장치, 공화당에서 자신을 암살하려 했다고 주장한 사건이다. 조사결과 이 폭발물은 어린이들의 장난감용 딱총 화약을 은박종이에 싸서 배터리 전지로 폭발할 수 있게 만든 조잡한 것이었다. 김대중 암살용 폭발물이었다면 이같이 조잡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결국 김대중이 조카를 시 켜 저지른 조작극으로 밝혀졌었다. (김대중의 사기 행각) 김대중은 현재(1980) 그가 살고 있는 서울 마포구 동교동 자택을 비롯한 부동산 4억원, 동 산 1억원 등 5억원의 재산을 갖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지난 2월 29일(1980) 복권 후에는 자신이 집권할 경우 경제적 이권, 정부 요직 등을 미끼로 각계인사로부터 무려 12억 원 이상을 받아내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가 정치자금을 조달한 것은 대부분 파렴치한 수법에 의한 것들이었다. ▲우선 1959년 6월 인제 지구 재선거에 출마했을 당시 그의 선거참관인 중 문수룡이 참관도 중 급사하자 민주당에서 조위금으로 보내온 30만원 중 18만원을 횡령 착복했고 ▲50-56년 사이의 목포해운회사 경영 중 선원봉급과 배를 판돈 1억 5천만원을 횡령, 도주했 다. ▲또 60년 4월~61년 4월까지 민주당 선전부장으로 재직할 때 학원공작구실로 조달한 3천7백 만원중 7백70만원을 횡령, 검찰에 구속 송치됐다. ▲7대의원 당시에는 8대 국회의원 당 공천을 해준다고 속여 박종태로부터 5백만원, 김세종 으로부터 3천8백50만원, 이원형으로부터 1백만원 등 4천4백50만원을 사취했다. 그후에도 국회의원이란 직위를 악용, 호남제분, 동아건설, 대한농산, 삼양수산 대표들로부터 거액의 정치자금을 받아낸 사실도 밝혀졌다. 1972년 10월 김대중이 일본에 머물고 있을 때 10월 유신으로 계엄령이 선포되고 국회가 해 산됐다. 그러자 김대중은 일본과 미국을 왕래하며 한국에 대한 경제원조와 군사원조의 중단, 망명정부수립, 김일성 정권과의 접촉시도 등 반국가적 행위를 자행했다. 1973년 4월에는 미국 하버드대 코헨 교수에게 한국의 박정권을 타도하기 위해서 미국이 대 한 군사원조를 중단하고 주한미군을 철수시키도록 미의회 지도자에게 압력을 넣어달라고 호 소했다. 또한 미국에서 북한을 방문한 친북괴 분자들을 만나 반국가 단체를 조직했다. 천하의 사기꾼이 전라도의 신 김대중의 둘째 아들 혼자 굴린 비자금도 100억이나 된다 합니다. 정권의 시녀 검찰이 숨 기고 또 숨겨주다가 어쩔 수 없이 솟아난 돈이 이렇듯 큽니다.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은 빙 산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2002.5-6월 사이에 그의 두 아들이 서울구치소에 수감됐습니다. 둘째 아들이 감방에 가는 날 김대중은 축구경기를 보며 순진한 어린이의 얼굴을 해 가지고 만세를 불렀습니다. 그만큼 그는 무서운 사람입니다. 그 얼굴로 그는 무슨 사기라도 칠 수 있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국민을 속였습니다. 빚을 끌어다가 물쓰듯하면서 경제가 잘 돌아간다고 속 였습니다. 그 빚으로 김일성에게서 받은 정치자금을 몇 백 배로 갚아주고 있습니다. 그 돈을 풀어 식물기업을 살려가며 돈을 뜯어내고 있습니다. 그 돈으로 국내외에서 말 꽤나 하는 사 람들을 매수했습니다. 그리고 저지른 죄가 무서워 이 나라를 김정일에 바치려 합니다. 희대의 사기꾼, 도둑들로 채워진 가정의 가장, 이적질하는 내통자를 우리국민은 언제까지 대통령 자리에 앉힐 작정입니까? 이완용이라는 한 개인도 나라를 팔아먹었습니다. 희대의 사기꾼이 대통령 자리에 앉아 있고, 용서받지 못할 엄청난 죄를 졌습니다. 그는 퇴임 전에 나라를 김정일에 넘길 수 있습니다. 또한 국민의 자존심도 그를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인간을 더 이상 우리의 대통령 자리에 둘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이제는 나서야 한다"(2002년) https://www.youtube.com/watch?v=S4_KqiujIxQ 2016.7.30. 지만원 http://www.systemclub.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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